역사, 인물

유럽 반유대주의의 기원과 전개

김남시 2001. 2. 25. 09:30
(지난 호에 언급되었던 글을 보충하여 올립니다. 저 거대한 인종 학살을 낳았던 유럽의 반유대주의의 기원가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유럽에서 반 유대주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우린 우리에게 알려진 많은 사람들에게서 유대인들에 대한 멸시 혹은 비꼼, 나아가 그들에 대한 증오까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일찌기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금전적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지독한 인색한으로 묘사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이론을 통해 전통적인 반 유대주의를 설명하면서 은연중 그 시대의 반 유대주의를 드러낸 바 있는데, 그에 의하면, 유대교적 관습에 의해 모든 유대 젊은이들에게 행해지는 '할례'는 모든 유대인들을 상징적으로 '거세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프랑스 혁명이 지난 후에도 유럽과 프랑스 내에 퍼져있던 반 유대주의 감정을 주인공의 친구 블로크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저 완강한 반 유대주의의 뿌리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는 그 최초의 기원을 우린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종교적 적대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성서는, 모세의 율법(구약)을 공유하고 있던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예수의 등장과 더불어 긴장과 갈등을 쌓아가다 급기야 예수의 십자가형을 통해 화해하기 힘든 대립으로 치닫게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첫 공식 데뷔 무대였던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율법을 긍정했던 (마태 5:21) 예수가 점차 '율법학자, 바리사이파'와 자신의 가르침을 구별하면서 - 이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마태 9;7, 마르코 2:18, 루가 5:33)를 통해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 급기야, 그들을 '위선자, 눈먼 인도자, 뱀 같은 자들,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저주(마태 23:18-19, 마르코 12:38-40, 루가11:37 등)함으로써 유대교적 율법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과정은, 구약 예언 계승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유대교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기독교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입장에선 유대교인들은 스스로 '유다인의 왕'이고자 했던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요한 19:24) 기회있을 때마다 시험하고 배척했던(요한 10:28) 의심하는 자들이자,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마태오 26, 루가 22, 마르코 14, 요한 18 등) 장본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총체적 지배의 요소와 근원들} 1권 '반 유대주의'에서 근대 이후 유럽의 반 유대주의를 이러한 종교적 대립과 갈등의 역사에서만 이해하려는 시도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렇게되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하나의 역사적 필연 또는 유대인의 숙명으로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반 유대 감정이 종교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근대 이후의 반 유대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와 민족 국가의 형성을 거치면서 보다 깊은 사회, 경제,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국가로 한 곳에 모여 살아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기독교 문명으로 통일되어있던 여러 유럽 국가들에 흩어진 채 소위 유대인 게토, 곧,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대부분 행상 및 수공업에 종사하며 정치적, 법적 권리를 제한 받으며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러한 중에도, 치밀한 계산 능력과 탁월한 수완을 발휘, 유럽 여러 군주 국가들의 궁정에까지 진출하는 유대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궁정 유대인(Hof-Juden)이라 부른다. 이들은 주로 군주 및 왕가의 재정을 담당하며 통치자가 경제적으로 귀족들의 수중에 들지 않게 도와주었다. 17-18 세기 유럽 대부분 궁정의 재정이 이들 유대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스페인 출신 유대인 은행가를 두고 있었고, 올리버 크롬웰 역시 유대인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 17세기 영국 정권의 차관 4/1이 12명의 유대인 중개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18세기 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가는 유대인들로부터 3천5백만 굴덴 이상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1703년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궁정 유대인 Samuel Oppenheimer가 죽자 오스트리아 국가 뿐 아니라 왕국도 파산지경에 이르게 될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고취된 계몽주의적 요구와 유대인들을 그들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국가적 정책에 따라 1791년 프랑스에서, 1812년엔 프러이센에서 연이어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 정치적 제한이 공식적으로 철폐되게 되는데(유대인 해방), 이로 인해 이제 유대인들에겐 개종과 기독교 교회에서의 세례가, 사회적으론 다른 직업을 갖는 것 등이 원칙적으로 허용되게 된다. 이를 통해 개종과 유럽인들과의 결혼 등을 통해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잃고 그 사회에 통합되게 된다. 한편, 대다수의 궁정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력과 재산을 바탕으로 군주제가 폐지된 많은 국가들에서 은행가나 대부업 등에 진출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의 돈줄을 장악하게 되는 바, 이로 인해 각 국가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발전을 위해 유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매우 인색하고,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만 사고하는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이 시기에 형성되게 된다.

프랑스 혁명과 연이어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에 맞선 외세와의 싸움을 통해 각 국가에선 서서히 '우리들의 국가'라는 관념, 곧 민족주의가 자라나게 되었다. 식민지와 상품 시장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경쟁이 이러한 민족국가들 사이의 대립으로 치닫게 되자, 유럽 각국의 사회, 정치적 기류는 유대인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가게된다. 그건 유대인들이 각국에서 점하고 있던 아래와 같은 독특한 지위 때문이었다.

첫째, 아래로부터, 최소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거치긴 했지만 혁명 이후의 민족 국가는 여전히 그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가 계급적으로 서열 지워져 있는 계급사회였다. 각 개인들의 지위는 그의 계급 속에서의 그의 지위 곧, 사회의 다른 계급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었다. 그 유일한 예외가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사회 내의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들에게 비우호적인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그들의 생존을 언제나 중앙 권력과의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유태인들의 존재 조건상 당연한 것이었다. 계급 사회 속에서 그 어떤 계급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계급간의 갈등과 반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그 어떤 계급과의 사회적 결속력도 갖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을 더욱 더 고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 초기 자본주의와 산업 혁명기 유대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금융 및 유통 부문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유대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는 부가가치의 원천 곧, 생산수단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들끓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발과 분노를 대중적인 반 유대주의의 분위기로 몰고 가려는 자본가와 파시즘 세력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노동자가 평생 만져볼 수 없는 돈을 유통시키고, 도저히 구매할 수 없는 상품들을 선전하고 판매해야 했던 유대인들이 이들에겐 자본주의적 착취의 수혜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말을 빌리면, 이를통해 "전체 계급의 경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이 유태인의 어깨에 지워"지게 된다.

세째, 특유의 강한 종교적 결속력과 적대적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었던 유대인들의 폐쇄성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간의 국제적 유대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각국의 유대인 상인, 은행가들은 국제적 차원의 대부 및 무역, 심지어 외교적 중재 업무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국제적 결속은 사회 내에서 유대인들의 계급적 불투명성과 더불어 민족국가들 내에서 유대인들의 고립을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 국가의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으며, 심지어 경쟁 혹은 교전하고 있는 다른 국가와 관계 맺고 있는 유대인들이 민족국가 구성원들에겐 각 민족 국가의 경제적 부를 갈취해 가는 국가 외적 세력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적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에서 Lutz Winckler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분석하면서, 소자본가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던 파시즘이 자신의 사회적 지배를 위해 이러한 조건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는,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유대인과 유대인의 국제적 자본'을 '아리안 민족과 독일의 민족경제'를 위협하고 갉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면서, 독일인들의 민족주의적 욕구를 반 유대주의를 향해 불러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와 볼세비키 혁명을 '유대적 질병', '자유로운 민족들을 노예화하려는 국제적 유대인들의 경제적 무기'라고 정의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반 유대주의로 유도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거대 자본과 경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들끓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혁명 요구를 무마시켜야 하는 민족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회 내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첨예화시킴으로써 적과 아를 명확히 해주는 사회-정치적 혁명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1차 대전 이후 공황으로 불거져 나온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통스럽게 경험해야 했던 독일인들에게는 이러한 파시스트적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과격한 반 유대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급기야 약 600 만 명의 유대인을 희생시킨, 20세기 초유의 인종학살을 낳는 주요 원인이 된다.


참고문헌
Hanna Arendt Elemente und Urspr nge totaler Herrschaft, Bd. 1. Antisemitismus
1951
Lutz Winckler, Studie zur gesellschaftlichen Funktion faschistischer Sprache, 1970
서울대학교 독일학연구소, 독일 이야기 1.
Adorno, Horkheimer, {계몽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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