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지식, 암기, 인문학 전문가와 딜레당트

김남시 2005. 9. 3. 03:14

비평고원 카페의 로쟈님의 글을 통해 니체 저작을 달달 외웠다는 니체 연구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니체를 연구하겠다고 온 학생에게 저작을 외우라고 요구했던 그 독일대학 철학과 교수의 (외국인 멸시적인) 오만함과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니체의 저작을 어느 페이지의 오자까지 기억할 정도로달달 외웠던 그 연구가의 남다른 뚝심과 오기도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 싶은 것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특정 저자의 텍스트를 달달 외웠다라는 사실을 21세기 철학 연구가의 전문성을 판단하는 중요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을, 그것도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지식의 전문성을 텍스트에 대한 암기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저 특정한 지식관 속에는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 좁게는 지식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특정한 문화적 지형도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서양 지식의 역사 속에서 지식을 외우고 암기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바로 문자가 생겨나기 전, 혹은 문자를 통해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구술문화 시대였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한 공동체가 살아나가는 데 필수적인 삶의 실천적 지식들 농사나 사냥 방법, 사회생활의 규칙과 금기 등 과 그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시켜 주는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지식들 신화나 전설, 영웅의 일화 등 을 문자가 아닌 구전을 통해 전달하고 보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 저 지식들은 책이나 석판이 아닌 사람의 머리에 새겨져 암기되어야 했다. 이 지식들은 뮤즈의 영감을 받아사람들에게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던 시인들에 의해, 혹은 노동요 등을 통해 집단적으로 암기되었고, 그를위해 지식들은 암송과 암기에 편한 운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         

 

문자가 생겨나면서 저 지식들은 이제 문자로, 책으로 정착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각 문화권의 전범적 Kanon 텍스트의 형성 과정이기도 했다. 이슬람교의 코란, 기독교의 신약과 구약 등 은 이렇게 그전시대까지 구전되어 오던 그 문화적 공동체의 지식들이 선별 과정을 거쳐 정착된 Kanon적 텍스트 들이다. 이렇게 지식들이 텍스트화됨으로써 이제 사람들은 그를 더 암기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전까지 공동체 성원들의 집단적인 육체적 참여를 통해 전승되던 그들의 집합적 기억은, 문자화되고 나면 그 구속성이 약화되고 그에대한 비판적 태도의 가능성을 생겨나게 한다. 몸으로 체득하던 지식이 텍스트로 대상화됨으로써 사람들은 그에대한 반성적 거리감을 갖게되기 때문이다.[2]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의미하게 될 이러한 위험을 그리하여, 공동체는 그 전범적 지식의 육체적 전유“, 곧 암기를 더욱 더 강조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말씀을 마음에 새겨라. 불로 새겨진 글자등의 메타포들은, 공동체의 구속적이자 규범적인 집합적 기억으로서의 Kanon적 텍스트들을 암기를 통해 자신 삶의 실천으로 실현시키길 요구했었던 시대의 멘탈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공동체는 개인에게 암기를 통해 그 공동체의 구속적이자 규범적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키려고 하며, 우리는 이 사실을 국기에 대한 맹세애국가’, 심지어 국민교육헌장까지 외워야 했던 우리들의 체험으로부터 확인한다.      

 

서양 역사에선 또 한번 지식에 대한 암기가 그 지식을 둘러싼 권위와 권력의 역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졌을 때가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주의의 시기다. 이상화된 고대가 유럽 사회의 정치, 문화, 사회적 이상으로 재 발견되면서 고대 작가들의 문헌들은 당대의 철학, 역사, 문학 등의 지식들의 정당성과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를통해 키케로와 세네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을 사람들과의 대화에, 자신이 쓴 책에, 심지어 자신이 사는 집과 죽어 묻힐 묘비명에 인용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특정 지식의 권위와 전문성이 과거의 지식에 대한 암기에 의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를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고대인들의 문장을, 그것도 라틴어 원문으로, 머리 속에 담고 적절한 순간에 그를 사용할 수 있는 걸 교양과 지식의 결정적 징표로 여겼고, 이를위해 특정문구들을 시각화시켜 암기하게 해주는 기억술[3]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출판되고 있는 수십종의 소위 인용사전들은 그 흔적들이다.

 

과거 지식들에 대한 암기를 중시하던 이러한 태도는 서양에선 18세기 이후 비판받기 시작한다. 이전의, 암기해야 할 지식이 갖던 규범적이며 구속적 성격이 종교개혁 등의 사회적 변화를 거쳐 서서히 붕괴되고, 그를 대신해 경험적, 자연과학적 태도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갖던 부동의 권위가 경험적 관찰을 통해 흔들리는 것과 때를 같이해, 데카르트는 과거의 책 속의 죽은 지식에 의존하는 대신 인식하는 주체 자신의 확실성에 의거한 지식의 획득을 더 큰 철학적 목표로 삼는다. 베이컨은 그의 우상론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낡은 언어가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우상임을 경고하고,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로크는 어떻게 낡은 언어가 우리 인식의 명료함을 가로 막는지가를 지적하며, 콩디악은 세계 내의 어떤 사물들과도 관계맺지 않는 공허하고 불필요한 언어들이 어떻게 우리의 인식을 혼동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지를 경고한다.[4] 암기하고, 외워야 하던 과거의, 텍스트 속의 지식들은 이제 우리의 세계인식을 저해하고, 가로막는 인식의 장애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분격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방법론적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근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더 이상 암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아가 특정 지식에 대한 암기를 그 지식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연결시키던 낡은 관습은 컴퓨터, 인터넷 등을 통한 디지털화가 본격화되면서 급속도로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검색어 하나로 단 번에 모든 관련 내용들을 찾아주는 한 장의 니체 씨디롬은 니체 전집을 달달 외우고 있는 전문가보다 훨씬 값싸고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았던 헤겔이 철학사를 썼고, 니체 전집을 달달 외우지 못했던 하이데거가 니체에 대한 전문적 해석가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사회가 특정 텍스트에 대한 암기를 그의 전문성과 연결시키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무엇보다 한국 지식사회의 식민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와 전망 대신에 서양의 그것에서 기인한 이론들을 수입하고 전달하는 걸 목표로 삼아왔던 한국 지식사회에 저 서양 텍스트는 누가 그를 더 많이 암기하고 있는가를 통해 전문성을 보장받는 Kanon 적 텍스트에 다름 아니다. 이해되고 그를통해 우리의 문제를 사유하는 발판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외워지고 수용되어야 하는서양 텍스트에 대한 물신화된 태도가 여기에 드러나 있다. 이러한 태도가, „한 글자라도 틀리게 옮겨쓰면 이 세계가 붕괴한다고 믿는 카발라 필사자들[5]처럼 헤겔의 텍스트를 옮겨쓰거나 컴퓨터에 쳐넣고, 그를 달달 외우는 헤겔 전공자를 다른 누구보다 권위있는 전문가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의 존재기반에 대한 위기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15세기 쿠텐베르크의 활자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지식인들은 대학이라는 학문길드를 만들어 그 출신자에게만 학문 시장에의 출입을 제한함으로써 지식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려 했다. 그후 대학은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학위 제도와 학문적 서열을 통해 끊임없이 소위 지식 딜레탕트들을 성스러운 학문 시장으로부터 배제해왔다. 오늘날 인터넷 등의 정보매체를 통해 누구라도 손쉽게 모든 종류의 지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지식인들의 지위는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인터넷 시대 이러한 지식의 보편화에 대항해 이제 한국의 지식인들은 텍스트 암기라고 하는, 지식사의 첫장을 차지했었지만 오래동안 잊혀져 있던 낡은 방법을 소위 전문가와 딜레탕트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재도입하려 한다. 그리고 이 기준은, 아무리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된다 하더라도 외국어로 된 어려운 텍스트를 달달 외우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요구를 십분 충족시켜 준다.

 

니체 혹은 헤겔의 텍스트를 암기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방식으로 인문학 딜레탕트들을 인문학의 장에서 몰아내려 한다면, 그건 그렇지 않아도 사경에 처한 인문학의 붕괴를 재촉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인문학은 헤겔과 칸트와 니체의 텍스트를 달달 외우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남긴 한 문장, 한 구절에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상상력을 일구어내고 그로부터 풍요로운 담론들을 만들어 내는 딜레탕트들의 활동으로부터 자신의 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암기 전문가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외운 걸 암송하며 자위하는 동안, 저 딜레탕트적 상상력은 묵묵히, 그러나 즐겁게 인문학이라는 토양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다.           

 

 

 

 



[1] 이에 대해선 발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예출판사) 참조.

[2] 이에 대해선 Jan Assmann :  Das kulturelle Gedächtnis. Schrift, Erinnerung und politische Identität in frühen Kulturen, 1992 München, S.99.  참조.

[3] 서양 기억술에 대해선 Frances Yates, The Art of Memory, Pimligo 2001 참조.

[4] James Knowlson : Universal Language Schemes in England and France 1600-1800,Toronto and Buffalo 1975, S.164.

[5] Gershom Scholem : Zur Kabbala und ihrer Symbolik, Shurkamp 1973, S.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