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황우석, 과학, 세계에 대한 두가지 단상

김남시 2005. 12. 24. 22:42

 

첫번째 단상 :  오늘 아침 독일 신문과 방송들에는 크론 연구자 조작범으로 밝혀지다“, „크론 연구자가 세계를 속였다라는 제목으로 황우석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일면을 장식했다. 티브이엔 그가 사퇴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내겐 카메라가 그에게 다가가자 학계를 떠나기로 자신의 지도교수의 체면을 끝까지 몸으로 방어하려는 옆의 대학원생들이 눈에 띄었다. 한때, 자신의 커리어를 좌우했었던 몰락하는 지도교수 대한 인간적 연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공식적으론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지도교수의 진실 확신하는, 아니 확신하고 싶어하는 자기연민이 그를 학교를 떠나는 지도교수의 마지막 명예를, 난폭한 카메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지게 했던 것일까. 어쨋든 장면은, 한국적 인간관계의 논리가 아카데미의 제도와 조직 속에도 얼마나 깊게 뿌리박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지도교수에 대한 인간적 의리와 충성이, 정작 그와 관계를 맺게 했던 학문적이고 제도적인 동기보다 크게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한국적 Homo Academicus 모습을.

 

 

 

두번째 단상: 1610 3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 처음으로 달의 표면이 유리처럼 매끈하고 맑지않고, „마치 지구 표면처럼울퉁불퉁한 웅덩이와 거친 언덕들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획기적인 역사적 발견을 알리기 위해 그는 사실을 자신의 후원자 메디치가에 헌정한 Siderus Nuncius 에서 공표한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책에 그가 망원경으로 관찰한 표면의 그림을 실었다. 그러나 그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우리 육안에 보이는 매끈하고 빛나는 달의 모습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은 갈릴레이가 관찰했다는 얼룩진 달의 그림을 인정할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조작된 것이거나 아니면 시각적 착각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정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직접 달을 들여다보게 했던 다른 동료 과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괴상하게 생긴 처음보는 도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얼룩진 달의 모습이 진짜 달의 모습이라고 어떻게 믿을 있단 말인가. 낯선 도구가 달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왜곡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갈릴레이의 망원경과 그를 통해 들여다본 표면의 그림은 서양 과학사에서 처음으로 과학 연구의 진리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육안에 드러나는 사물들의 모습과 과학적 도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사물들의 모습 사이의 간극은 이제 더이상 과학 연구의 진리성이 우리의 일반적인 지각 가능성에, 나아가 우리의 소위 건전한 이성 의해 결정될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의 전문화된 과학은 갈릴레이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육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학적 도구들 의존하고 있다. 전자 현미경을 통해 드러나는 세포나 디엔에이 사진, 초음파 탐지기나 단층 촬영기가 보여주는 육체의 내부 그림들을 보고도 우리 일반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도무지 그게 무언지 조차 확인할 없다. 줄기세포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결과의 증거물 제시하는 전자 현미경 사진들을 보고도 우리는 그의 연구결과가 사실인지 조작인지 판단할 없다. 오늘날 과학적 연구가 의존하고 있는 가시성의 영역은 이미 오래전에, 일반인들이 살아가면서 활용하는 가시적 지각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과학이 더이상 일반인들의 가시적 지각의 영역이 아니라, 전문화되고, 수많은 해석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비가시적 지각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과학의 진리성이 일반인들의 건전한 이성 아니라, 전문가들의 전문적 이성 권위에 의해서만 판단할 있게 되었다는 의미한다. 황우석 교수가 제시한 줄기세포 사진 진짜인지, 조작된 것인지, 우리 일반인들은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보아도 판단할 없다. 그건 분야에 종사하는 다른 전문가들에게만 가능하다. 과학은 이처럼 우리 일반인들의 판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율화되면서 일반인들에 대한 권위를 얻었다. 이로인해 과학적 연구의 진리성을 둘러싼 논쟁은 종종 진리성을 주장하는 서로 다른 과학적 권위 사이의 힘겨루기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연구논문의 사진이 조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교수를 일거에 세계적인 클론 연구가 만들어 주었던 것도 <사이언스>라는 과학잡지의 권위였고, 권위는, 정작 그의 연구에 대해선 아무 개념도 없는 일반인들조차 연구의 진리성 확신하게 만들었다. 연구 결과의 조작 가능성이 논란되고 있을때, 이를 직접 판단할 없는 우리들은 우리의 무능한 이성 대신해 그를 판단해 다른 권위 찾아다녔고, 그로인해 생겨난 권위들 사이의 다툼은, 누가 어떤 권위를 권위있는것으로 받아들이는가 라는 정치적 판단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이되었다. 피디 수첩과 김선종 연구원, 노성일 원장, 새튼 박사 등의 권위 사이를 배회하면서 우린 황우석 교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마치 연구의 진리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의 결과인양 열을 올렸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과학적 연구의 진리성을 판정해주는 권위들이 과학 자체의 진리성 보다는, 얼마나 많은 과학외적 요인과 힘들에 의존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이언스>지는 경쟁지 <네이쳐>보다 먼저 센세이셔널한 연구논문 발표하기 위해 논문의 진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추락한 민심을 과학이라는 신화를 통해 만회해 보기위해 그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고, 그와 연구를 함께했던 연구원들은 커다란 사회적 기대와 압력, 세계적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는 과학 외적 자부심을 통해 연구의 효과에 비하면 지극히도 사소해 보이던 작은 절차상의 문제들을 보아 넘겼다. ‚대의 위해서라면 사소한 절차와 규정들을 무시할 있는 대범함은 지금까지 한국 학문 문화의 관습적 미덕이었다.    

황우석 사태는 근엄한 과학적 연구 시스템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그를통해 과학이 진리와 진리 사이의 싸움이라는 거대한 신화적 우주 속에서가 아니라, 돈과 권력, 힘겨루기와 경쟁이 지배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진부한 사회의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를위해 우리가 있는건,  삶의 세계에서 초월해 있음을 주장하는 과학을 끊임없이 삶의 세계가 지배받아야 하는 규칙과 규범의 맥락 속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