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2008년 7월 1일) 혁명, 폭력, 주권자

김남시 2008. 7. 2. 20:53

 

프랑스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2 12. 루이 16세가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꾀하다 발각되어 일종의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하게 된 지 1, 그리고 9 21일을 기해 프랑스의 왕정이 철폐되고 공화국이 선포된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에서 사람들은 왕위에서는 퇴위되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루이 16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가지고 이 해 11월부터 논쟁을 벌여오고 있었다. 이 논쟁의 와중에서 용감하게도 국민공회에서 루이 16세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보르도 출신의 변호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Romain de Sèze (1748-1828)였다. 로맹이 루이 16세를 변호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와 그에 대한 반대파와의 논거들은 오늘날 주권자, , 그리고 법적 질서의 근거를 이루는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오늘날 우리의 사유에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로맹이 루이 16세를 변호하기 위해 내세운 논거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왕정의 폐지로 왕위에서 폐위된 루이 16세는 그 자체로 이미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다시 판결하려는 것은 동일한 행위에 대해 이중의 처벌을 가하는 것이 된다. 둘째, 왕위에서 폐위되어 일반 시민이 된 루이 카페 Capet (루이 16세의 시민으로써의 이름) 를 그가 왕이었던 시절 행한 행위로 인해 처벌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판결을 내리는 순간 그것은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 루이 카펫을 왕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 취급하고 판결하려 한다면 당연히 그에게도 공화국 헌법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어 있는 법적 권리와 보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재판이 선행되어야 하며, 거기서 그에 대한 판결이 법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 모든 날카로운 지적들과 더불어 로맹이 내세운 논거들 중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주권자 Souveräne로써 루이 16세에게 주어져 있던 침해 불가능성 Unverletzlichkeit’의 문제였다. 로맹에 의하면 왕에게 부여되어 있었던 주권자로써의 특권은 혁명으로 인해 왕정이 철폐되었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권자에게 부여되어있는 침해 불가능성은 특정한 개인에게 주어진 개별적 특혜가 아니라 한 법적, 정치적 질서가 자신의 주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군주제에서 왕이라는 모습을 하고 있건, 아니면 (프랑스 혁명 이후에) 민주주의에서 국민 일반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건 주권자에게는 해당되는 법적, 정치적 질서의 외부에 위치할 수 있는 자격 혹은 능력이 보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에 근거해서만 현존하는 법적, 정치적 질서가 정초되기 때문이다.[1] 로맹에 의하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왕위를 계승한 루이 16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주권자였으며, 바로 그로인해 프랑스라는 국가의 주권적 지위가 보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맹은 법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이러한 주권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적용 가능한 법이 없다면, 판결은 불가능하며, 판결이 불가능 한 곳에선 처벌 또한 가능하지 않다.“ [2]

 

루이 16세를 변호하면서 로맹은 주권자와 법, 정치적 권력 및 주권적 폭력에 대한 핵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모든 법적, 정치적 질서 자체의 원천이었던 주권자로써의 왕을 어떤 법적 근거에 의거해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은 재판도 없이 왕을 사형시키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혁명 이후 현 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혁명세력이 말하는 새로운 법적, 정치적 질서가 아니라, 다만 자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폭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벌어진 이 상황이 조오르지오 아감벤이 정의하는 예외상황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혁명으로 인해 기존의 법적, 정치적 질서는 이미 보류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새로운 법적 질서가 수립되지는 않은 법적 아노미 상태. 그럼에도 어떤 힘/권력/폭력이 작용하면서 그 법적 공백의 사회/국가 질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시키고 있는 상태.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로맹이 루이 16세를 변호하던 당시의 예외상황을 유지시키고 있던 힘/권력/폭력이 이전 시대의 주권자인 왕, 곧 루이 16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예외상황을 유지시키고 있던 이러한 주권자적 폭력은 이제 막 혁명을 진행시키고 있는 주체들과 아직 살아있는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집결하던 왕정주의 세력들 사이에 팽팽하게 분산되어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 혁명적 회귀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대다수 민중들은 루이 16세 치하 전제주의하에 큰 불만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를 여전히 신성한 존재[3]로 여기고 있었고 그런 왕을 처형시키라는 주장엔 일말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혁명으로 인해 생겨난 법적, 정치적 공백은 아직 완전하게 혁명 세력의 힘/권력에 의해 점유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당시 국민공회에서 이루어진 루이 16세의 재판을 둘러싼 논쟁이 단순한 법적 절차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주권자적 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투쟁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루이 16세의 불가침성을 이야기하는 로맹은 그를통해 이전 시대의 주권자인 왕의 주권적 힘/권력/폭력을 상기시킴으로써 당시 법적 공백의 예외상황을 왕정파에 유리하게 전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전략가 로베스피에르는 당시의 이런 정치적 상황을 너무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루이 16세를 둘러싼 재판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당시 예외상황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혁명세력과 왕정주의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주권자적 힘/권력/폭력의 투쟁이 혁명세력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왕의 치적과 불가침성이 재판이라는 합법적으로 개설된 공간 속에서 공공연하게 변호되는 동안 왕은 주권자로써 그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후광을 다시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예외상황은 왕정 주의자의 주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택한 전략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그건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위해 그가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혁명적 폭력에 직접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 12월 행한 연설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를 판결하기 위해 재판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거부한다. 그건 재판이라는 법적 제도가 최종 판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피고인을 - 이 경우엔 루이 16세를 - 무죄로 간주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재판 결과에 따라 루이 16세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을 통해 루이 16세가 무죄로 판결된다면 그건 혁명을 통해 자유를 원하던 사람들을 루이 16세에 대한 모함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러한 점에서 재판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이미 반 혁명적 생각이며 혁명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루소 주의자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혁명을 통한 왕의 폐위는 민중에게 주어져있는 자연적 권리의 행사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이전의 법적 질서들을 대신해 들어서야 할 것은 사회의 근거를 이루는 자연의 법들, 곧 민중의 안녕 das Wohl des Volkes“ 이다. 그리고 이 자연의 법은 그 자체로 루이 카페의 존재와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있다. 그러한 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공화국이, „혁명 조국이 살기 위해서 루이는 죽어야만 한다[4] 고 말한다.

 

여기서 로베스피에르가 법적 질서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의 발터 벤야민의 태도와도 유사하다. 왕정주의자들이, 또 그에 대응하려는 다른 정치가들이 루이 16세 판결의 법적 근거를 따지는 논쟁에 빠져있는 사이 예를들어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이었던 Louis de Saint-Just는 루이는 왕도, 시민도 아닌 프랑스의 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따라서 국제법에 의거해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로베스피에르는 이러한 법치적 juristische 컨텍스트에서 벗어나 그런 법적 질서의 근본을 이루는 보다 더 근본적인 혁명적 폭력의 문제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루이 16세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왕이라는 개인을 통해 체현되어 있는 전제주의적 폭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혁명이 그런 전제주의적 폭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 발터 벤야민의 용어를 빌자면 – ‚법을 정립하는 폭력인 한, 이전의 법을 유지하는 폭력의 구심점인 살아있는 루이는 혁명과 공존할 수 없다. 그는 죽어야만한다.

 

여기서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의 주장을 위해 기대고 있는 것은 어떤 전통적 권위도, 현존하고 있는 법적 근거도 아니라, 현실 정치의 합법/비 합법의 구분을 물론, 나아가 좁은 의미의 휴머니즘적인 윤리를 초월해 법치적 컨텍스트 외부에 있는 혁명적이고 메시아적인 에너지이다. 그것이 혁명적인 이유는 그것이 합/불법어떤 법? –, 휴머니즘적인 동정 등의 기존의 가치기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그것이 메시아적인 이유는 로베스피에르가 여기서 호소하고 있는 민중자연상태의 법이란 사실 현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부터 만들어져야 하는 어떤 요청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실존하는 루이 16세에 맞서 실체로 존재하고 있지 않는 어떤 유령적인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그를 현실 속에 주술적으로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효과를 발휘했던 것일까? 국민 공회는 1793 1 20일 이 모든 공방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루이 카페, „프랑스인들의 마지막 왕을 재판없이 – „24시간 안에“ -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여기서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을 거부하기 위해 민중자연상태의 법이라는 혁명적, 메시아적 힘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해서 그가 그에 의거해 재판제도그 자체, 나아가 법적 질서 자체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전 시대의 주권자 루이 16세에 대해 소위 민중자연 상태의 법을 새로운 주권자로써 호출하면서 대립시키고 있는 한 그의 입장은 당시의 법치적 컨텍스트를 넘어서고 있지만, 그러나 이는 결국 전제주의적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부르조아적 법적, 정치적 질서를 긍정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정립된 부르조아적 법적, 정치적 질서가 그를 보호, 유지하기 위한 국가적 폭력과 더불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법적, 정치적 질서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비로소 을 대신해 명목상의 주권자로 정의되어 등장한 민중/국민/인민은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시대에 그것이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메시아적 힘을 오래 전에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바쿠닌이 지적하듯 사실상 프랑스 혁명의 대립물이었던 나폴레옹 3 (보나파르트)의 칙령에서도 민중/국민/인민의 의지가 주권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지만,[6] 그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시대에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현존하는 법적, 도덕적 질서를 초월하는 정치적 영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듯, 보나파르트를 모두를 대표하는 자로써 황제에까지 오르게 만든 반 혁명적 역할[7]을 수행하였다. 나아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민중/국민/인민과 원리적인 주권자로써 그들을 대표해야 할 국가 권력 사이의 대립은, 주권자로써의 민중/국민/인민이라는, 한 때 혁명적이고 메시아적 에너지를 담지하고 있던 이념이 오늘날 얼마나 허구적이고, 반동적으로 변해버렸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민중/국민/인민이 국가의 주권자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그 먼지 덮힌 구덩이에서 집어내어 그 원리를 허구적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에 대립시키는 전략은 그렇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건 이 전략이 근거하고 있는 대립 – ‚허구적/실질적’ – 이 너무도 쉽게 체제 내적 개량의 논리로 환원되어 버릴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터 벤야민과 아감벤이 이야기하듯, 주권자 개념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일지도 모른다. 왕이건, 대통령이건 혹은 민중/인민/국민이건 거기에 법적 규범의 타당성보다 더 우월한지위가 부여되어 있는 주권자라는 개념은, 법적 질서가 유예된 상황에서도, 나아가 법적질서에 어긋나는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행정적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국가권력의 픽션[8]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9] 그것이 민중/인민/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건 아니면 그 민중/인민/국민 의지의 산물인 대통령 혹은 법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건 주권자라는 개념은 늘 어떤 질서의 지속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터 벤야민이 파국으로서의 역사와 관련하여 던지는 다음의 구절은 새겨볼 만 하다.

 

파국이라는 개념 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사 과정은 사유하는 자들에게는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회전시킬 때마다 그전에 정돈되어 있던 것이 새로운 질서를 향해 붕괴되는  만화경 Kaleidoskope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지배자라는 개념은 결국 거울들이고 그 거울들로 인해 어떤 질서의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만화경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Walter Banjamin, Zentral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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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슈미트가 이야기했듯이 주권자는 현존하는 법의 내부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할 수 있음으로써 비로소 그 법의 근거를 이룬다. 주권자는 그 일국적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타국과의 전쟁을 결정할 수도, 혹은 그 법 자체의 보류와 개정을 결정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권자적결정이 도덕적,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는 법적, 정치적 주권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2] 이하 Romain de Sèze verteidigt den König vor dem Nationalkonvent am 26. Dezember 1792. Histoire parlementaire XXII, S.17-19.

[3]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던 순간 수많은 사람들은 손수건에 루이 16세의 피를 묻히려고  몰려들었다. 그건 그의 피가 어떤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Daniel Arasse : Die Guillotine. Die Macht der Maschine und das Schauspiel der Gerechtigkeit, Hamburg 1988. 2 < 왕의 죽음> 참조. 

[4] Robespierre, 3. Dezember 1792. Über den Prozess gegen den König. In Reden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München 1974. S. 259.

[5] Louis de Saint-Just : Richtet den König, den Tyrannen! In : Quellen- und Arbeitshefte zur Geschichte und Gemeinschafskunde. Die Französische Revolution. Stuttgart 1966, S.44.

[6] Michail Bakunin: Gott und der Staat und andere Schriften. Hamburg 1969, S. 83.

[7]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17 이하 참조.

[8] Giorgio Agamben : Ausnahmezustand. (Homo sacer II.1), Frankfurt/M, 2004, S.71.

[9] 이러한 점에서 부르조아 정치 체제 에서의 허구적 fiktiv’ 인 인민/국민/민중 주권에 맞서 참된 인민/국민/민중 주권을 내세우는 바쿠닌 또한 그 아나키즘적 원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권력적 사회질서에 대한 지향을 갖고 있다. 이는 바쿠닌이 아동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정치이론의 핵심인 인간의 자유는 바쿠닌에겐 아이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교육의 자연적 출발점은 권위의 원리이며, 자유는 이러한 권위의 원리에 기반한 교육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자라나오는 궁극 목표이다. „원리적으로 모든 합리적 교육이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점진적으로 권위를 희생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 권위는 자유의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인 것이다. Michail Bakunin: Gott und der Staat und andere Schriften. Hamburg 1969, S.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