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엔딩 타이틀과 역사철학

김남시 2010. 2. 21. 21:06

영화에서 등장하는 „The End“라는 타이틀은 무척이나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건 무엇보다 영화화면의 환상 속에 빠져있던 관객들을 다시 현실 일깨우는 자명종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옛날 옛날에라는 이야기의 서두가, 우리가 있는 현실에서 우리를 말과 더불어 시작되는 가상적 공간/시간에로 이끌었다면, „- 살았답니다.“ 혹은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살아있을 거야라는 관습적인 이야기의 결미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가 들어와 있었던 가상적, 이야기의 공간을 막음질 해준다. 우리는 그런 엔딩 타이틀을 통해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의 터널을 통과해 그전에 우리가 있었던 바깥 세상으로 다시 빠져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 엔딩 타이틀은 역사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해피엔딩이건 혹은 비극이건 영화 안에서 이루어진 서사의 종결 알려주는 그것은, 그를통해 영화 내의 시간/역사의 최종 결론 암시한다. 영화에서 다루어진 시간을 넘어서 이후에 영화 주인공들이 어떻게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영화의 공간 속에서 하나의 완료된‘, ‚완결된역사/이야기를 하려는 영화 제작자의 의도를 무례하게 침범하는 것이다. 그건 완결된 이야기 완결될 없는 시간 혹은 역사 속으로 터뜨려 버림으로써 김이 빠지고, 생명력을 잃고,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의 모든 의미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는 테러행위다. 지구 멸망의 시간에 가까스로 방주를 통해 구원된 인류는 그러나, 영화가 끝난뒤에 다시 일어난 지구 행성의 폭발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지구인 아바타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낸 판도라 행성의 부족들은 그러나, 이후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찾아온 지구인들에 의해 멸종당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엔딩 타이틀과 더불어 거기서 종결되지 않는 우리가 보았던 영화 속의 사건들은, 그렇게 모든 가능성 향해 열려져있는 무책임한 시간의 바람 앞에서 혼동스럽게 흐트러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완결된 사건안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노력, 희생, 땀흘림은 수포로, 무의미로, 허무한 짓거리로 변해버린다.

 

벤야민이 역사철학 테제에서 유물론적 역사인식이 신학을, 구체적으로는 메시아주의를 자신을 위해 복무시켜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역사를 구원된종결점에서부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시점에서부터 바라보기. 그런 신학적, 아니 형이상학적 가정 –  als ob 마치  이듯이 없다면, 우리의 과거에 이루어진 인간들의 모든 패배와 희생과 투쟁, 지금 시간 우리가 쏟아붓고 있는 모든 애씀, 힘겨움, 고통스러움과 싸움은 폭력적인 열려있는 시간의 바람 앞에서 파국의 재로 쏟아져 내릴 뿐이다. 역사를 해방된, 구원된 자손의 눈으로 바라보기, 과거의 고통과 희생은 그를 통해서만 구원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가 끝나고 등장하는 엔딩 타이틀은, 그를통해 영화 속에서 진행된 시간을 종결시킴으로써 안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행동들을 구원해 주는 메시아와 같다. 그를 통해서만이 악인은 악인으로, 선함은 선함으로, 정의를 위해 희생한 자는 희생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를 통해서만이 신의 저주는 후에 다른 것으로 변질되지 않는 저주로, 누군가의 복수는 복수로,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을 있다.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 모든 것을 뒤집고, 모든 것을 반대물로 만들어 버릴 있는, 열려진 시간이 닫혀지고, 종결되어야만 시간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것들은 그것의 의미 유지하며, 바로 의미로써 인용 있다.

 

벤야민은 그것이 언제이든지 역사의 엔딩 타이틀을 우리 스스로가 걸을 있는 순간들이, 섬광처럼, 언제나, 지금- 이곳의 시간 속에 존재하며, 아니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시간과 역사에 대해 „The End“ 선언할 있는 순간, 그를통해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던 구원과 해방을 위한 노력과 희생이 구제될 있는 순간, 현재의 시간을, 역사를 중단 시킴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