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2010년 9월 10일) 회상과 역사

김남시 2010. 9. 10. 09:53

 

<카스트로, 미 잡지 인터뷰서 쿠바 사회주의 실패 인정>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과 인터뷰했다. 그는 거기에서 ‘쿠바 모델이 다른 나라에 적용될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쿠바 모델은 자국에서조차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1962년 미사일 위기 당시 구소련이 미국에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촉구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겨레 신문, 9월 10일자)

 

회고, 혹은 회상 Erinnerung 은 참으로 복잡한 함의를 갖는 인간 활동이다. 지나간 과거를, 그때 자신의 행동, 그를 동반하고 있었던 신념, 자신을 그런 행동으로 나아가게 했던 그때의 열정과 감정, 고통, 분노들,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살았던 순간들 gelebte Momente 이 그것을 회상하는 현재에 의해 ‘가치없는 일’로, ‘어리석은 일’, ‘실수’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로 부정되고, 무화된다. 이러한 방식의 회상은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그 살았던 순간들을, 그 순간을 채우고 있던 고통, 희망, 열정들을, 일순간에 무가치한 것으로,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으로 부정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과거였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 우리가 살았던 그 시간들을 우린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방식의 회상에서 그 회상의 주체는 그 지나간 시간들에 하나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던 삶들을, 현재라는 도달점, 혹은 목표를 향해 배열되어 있는, 혹은 배열되어져야 하는 연속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복기하듯, 과거에 이루어졌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때의 시간에 대해, 그것이 현재라는 도달점에 이루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던 ‘무가치한’ 것이라고, 오히려 그를 에둘러가게 만들었던 어리석은 ‘실수’였다고 낙인 찍는다. 그는 현재라는, 자신이 도달했다고 믿는 삶과 과거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이라는 자리에 앉아 열정과 희망, 고통으로 채워졌던 과거의 시간들이 “어린애 같은 도취상태”에서 이루어진 ‘달콤하지만 어리석은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과거의 삶이 한 시대의, 한 역사의 시대와 떼어놓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누군가가, 예를들어 카스트로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의 삶을 회상한다면 거기엔 한 무명의 개인의 회고와는 또다른 무언가 부당한 것이 생겨난다. 카스트로라는 한 명의 개인이 자신의 살았던 순간들을 탈가치화 시키는 동안, 그 삶에 함께 연루되어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살았던 순간들 역시 함께 부당하게도 그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을 위해 함께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들의 열정, 희망, 살았던 순간들, 그들의 삶의 시간들은 그와 더불어 ‘어리석은’, ‘가치없는’ 것이었다고 선언된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 살았던 그 시간들을 그는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일까?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역사의 적’이란 단지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계급’만이 아닐 것이다. 지배자들이 한 시대를 살았던 이름없는 동시대인들, 그들의 살았던 삶의 순간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전승들을 승리자의 것이라고 전유하면서 지배의 도구로 삼는다면, 과거의 투쟁을, 한 때의 치기어린 어리석음이었다고 회상 - ‘한때 그랬었지 Es war einmal' - 함으로써 그 문화적 전승에 삶을 바친 이름없는 이들의 삶의 시간을 ‘공허한 leer’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늙은 혁명가 역시, 그 과거의 순간 순간을 채우고 있던 고통과 희망, 열정을 깔끔하게 깍아내 역사를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의 연속’으로 가두어버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