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기다림, 시간, 메시아주의

김남시 2006. 4. 16. 07:34

 

무엇인가를 기다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차원으로 분기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시간과 저 무엇인가가 도래함으로써 시작하게 될 새로운 미래의 시간으로. 이를통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지금의 시간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빨리 도래하기 하기 위해 사라져 버려야 하는 심술궂은 방해물이 된다. 생일잔치나 부활절 휴일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지금의 시간은 조금이라도 빨리 극복해야 할’ – 이제 세 밤만 더 자면 돼! – 장애물이다. 제대를 기다리는 말년 병장에게 하루 하루의 시간은 달력에서조차 사라져버려야 할지긋지긋한 훼방꾼이다. 휴가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비행기나 기차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어서 빨리 단축되어야 할 여행의 필요악이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시작될 방학을 기다리는 학생에게 지금의 시간은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는 고통의 시간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으로써 지금의 시간은 이처럼 어서 빨리 제거되고, 사라지며, 극복되어야 할 거추장스러운 잉여물로 변한다. 

 

반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을 통해 시작될 새로운 시간을 꿈꾼다. 우린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 우릴 지금의 이 지겹고도 거추장스러운 시간으로부터 해방시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간으로 우릴 안내할 것이라고 믿는다. 생일 파티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에게, 여행지에서의 기쁨을 기다리는 여행자에게, 시험을 기다리는 학생에게 생일과 제대, 목적지에서 펼쳐질 여행, 시험이 끝나고 시작될 방학은, 지금 기다리는 시간의 온갖 방해와 고통을 극복하고 찬란하게 맞이하는 새로운 시간에로의 진입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 우릴 설레이게 하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그를통해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을 체험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린 그를 통해 펼쳐질 저 새로운 시간을 꿈꾸며 지금의 지긋 지긋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릴 셀레임과 희망으로 꿈꾸게 하는 저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는, 역설적이게도,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지금의 시간을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시간의 고통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를통해 저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생일과 제대와 여행지와 방학이 실제로 다가왔을 때 우리가 종종 경험해야 했던 놀라운 실망감들은, 기다리던 시간이 실제로 도래함으로써 새로운 시간에의 기대를 갖게했던 기다림의 구조 자체가 해소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어짐으로 인해,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생겨났던 서로 다른 두 시간의 차원  - 기다리는 시간/ 새로운 시간 은 다시 동질적인 하나의 시간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던 새로운 시간이 사실상 그를 기다리던 지금의 시간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기다림의 실망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린 더 이상 무엇인가를 설레임을 갖고 기다릴 수 없는 어른이 된다. 결국 모든 시간이 동질적인 지금의 일상적 시간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어떤 상실의 느낌도 없이 받아들이는 이가 냉소적 현실주의자가 된다면, 저 상실의 체험을,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상상적 시간 과거의 추억, 초월적 기의, 종교적 광신, 혁명 등 - 을 꿈꿈으로써  위로하려는 이는 멜랑코리스트가 될 것이다.

 

 

메시아주의를 통해 유대인들은 저 기다림의 구조에 기반한 유일무이한 기다림의 신학을 발전시켜왔다. 세상의 모든 부정의, 불공평, 억압과 악들이 심판받고 모든 인간들이 그들이 받았던 원죄와 삶의 고통과 짐들로부터 해방될 저 구원의 시간을 약속함으로써 메시아주의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수천년 동안의 굴곡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했던 기다림의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유대인의 메시아주의가 다른 세속적인 기다림의 구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대상, 곧 메시아의 도래가 세계 내적인 시간의 척도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1]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메시아는 자신이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것만을 선포했을 뿐, 언제, 어떻게 그가 이 세계에 오리라는 것은 그 어떤 세속적 역사와 시간의 척도로도 규정될 수 없다. 그는, 그를 기다리는 인간들의 요청과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가 오고자 할 때 스스로 오는 자이다. 그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메시아의 완전한 자기 규정성 앞에서 인간은 다만 그의 도래를 기다릴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메시아는 인간을 기다리게 하는 저 큰 권능을 누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로인해 유대인들은 모세에게 이끌려 이집트를 탈출한 지 수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저 오랜 고통스런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기다림을 포기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두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않는 시내 버스를 포기하는 것은, 20분을 기다리다 포기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다. 버스는 내가 그를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 언제라도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기다리면서 경험해야 했던 고통과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우린 그 기다림을 더 더욱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우린 차라리 버스가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림으로써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댓가를 보상받는 쪽을 택한다. 아직 오지않은, 그러나 반드시 올 것을 약속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이처럼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기다림 속에 붙잡아 놓는다.

 

기다림으로 인해 생겨나는, 비어있는“, 기다림의 시간은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시작될 저 충족된 시간에 의해서 비로소, 그 시간을 위한 준비와 예비의 시간으로서의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지금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사뮤엘 베케트의 Waiting for Godot 은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기다림의 토포스를 보여주고 있다.



[1] Gershom Scholem : Über einige Grundbegriffe des Judentums, Shurkamp 1970, S.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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