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스크랩] 흉내내는 아이 : 미메시스와 언어

김남시 2006. 4. 2. 15:10

 

이제 반인 아이가 어느날 분개한 표정으로 자기가 유치원에서 당했던 일들을 폭로하고 나섰다.  

 

"막심이 -렇게, -렇게 했져, 죠엘은 -렇게 했져

 

울먹이는 목소리로 "- 렇게, -렇게라고 말하면서 녀석은 유치원 같은 그룹에 있는

 

막심과 죠엘이 자기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녀석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들여다 보고 있자니, 막심은 녀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서 빼았았고,

 

죠엘은 지나가는 녀석을 밀쳤던 같았다녀석은 '막심이 자동차 빼았았져, 죠엘이  밀쳤어"

 

라는 대신에, 막심과 죠엘이 자기에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녀석이 유치원에서 보고 경험했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을 전달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샤리스가 웃었어"라고 말하는 대신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벌리며 샤리스가 웃는 모습을

 

흉내내거나, "유치원 선생한테 혼났어"라고 말하는 대신, 입을 벌리고 눈을 치켜뜨며 자기가

 

유치원 선생의 모습을 모방한다말하자면 행동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알지 못하는 녀석이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걸 자기 스스로 "흉내'내고 '재연'

 

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타인들에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편리하게 전달할 있게 주는  

 

언어라는 수단을 익히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직접 우리 육체를 동원해 '흉내'

 

내고 '재연'함으로써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밖에 없었다. 처음  물건의 모습을 손이나 몸을

 

이용해 묘사하거나 ('이렇게 생겼어!), 동물이나 사람의 행위를 직접 우리의 육체를 통해 '재연' (사자가

 

'어흥' 했어!) 하는 것이 이에 해당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를 사용하기 전의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우리의 육체를 우리가 경험한 대상들에 동화시키는 '미메시스적' 방식을

 

사용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우리의 육체를 사용해 흉내내거나 재연해 반복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정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 끼리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언어는 이처럼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을 간편하게 '지시'하는 단어들을 통해

 

육체가 동원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다. 우린 언어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들에 우리 육체를 동화시키지 않고서도, 타인들에게 그를 전달할 있다.  

 

언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사물들과 우리 자신의 육체 사이를 지시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물질적 단어들로 채워 넣었고, 이렇게 생겨난 세상과 우리의 육체 사이의

 

거리감을 통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우리가 경험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전달하고 활용하며,

 

나아가 장악할 있게 하였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우리가 경험하고 전달하는 세상과 우리 자신 사이의

 

미메시스적 동화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직접화법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가 시간이 없다고 하던데." 라는 간접화법은 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완전히 나의 말의 맥락 속에 통합시켜 버리고 있는데, 그를통해  말을 했던 당사자의

 

육체성은 3 인칭 대명사 ''  '-라고 하던데'라는 간접화법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을 하는 나와 내가 전하는 «  » 사이엔 언어가 확보해준 안전거리가 생겨난다.  

 

 

반면 말을 직접화법으로 전달하는 경우, 우리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그의 말을 다시한번

 

나의 육체를 통해 재연하고, 흉내내어야 하는데 - « ‘나는 시간이 없어 !’ 라고 말했어 » -  이를통해

 

말을 하는 순간, 말을 하는 나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  » 사이의 거리감은 1인칭

 

대명사 «  » 속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자기를 때리거나 밀치고, 자기 장난감을 빼았아간 다른 아이들을 흉내내면서, 아이는 어쩌면

 

자신이 당했던일들을, 자신이 했던일로, 말하자면 아이들의 행동의 대상이었던 자신을,

 

행동의 주체 변환시키는 심리적 보상기제를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를통해 아이는 그런 미메시스적 동화를 통해서만 열리는 인간 행위에 대한 상호주관적

 

시선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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