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아이와 메시아주의

김남시 2006. 10. 20. 19:01

 

메시아주의적 기다림의 독특함은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포기하고 있는 있다. 메시아주의는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구원을 우리가 직접 체험할 있으리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어떤 행위에도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자 메시아는 우리가 그의 구원을 직접 체험하리라는 기대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와 그를통한 구원에 대한 기다림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경제와 사회>에서 막스 베버는 메시아주의가 갖는 이런 독특한 기다림의 토포스를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베버에 의하면, 구원에 대한 자신의 직접체험을 포기하는 것이 메시아주의에서 낯설게 Befremdliches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아이들에 대한 근심과 보살핌이라는 유기적으로 주어져 있는 열망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열망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최소한 자신의 죽음의 차안 지시[1] 하고있다. 아이를 가진 부모가 자기 아이들의 삶을 생각할 그는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부모들의 삶의 계획은 자신은 이미 죽고 없을 아이들의 삶의 시간에 대한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부모가 이후 자식들의 삶을 위해 돈을 모으고 그들의 건강과 교육을 걱정할 , 부모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 자신의 죽음의 차안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얻지 못했던 희망과 목표를 아이들은 손에 넣을 있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그를통해 자신의 희망과 바램의 충족을 자신의 죽음 이후로 유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통해 부모는 자신의 희망과 바램이 충족되는 순간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기를 포기하지만, 그렇다고 충족에 대한 희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간으로 밀어놓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을 스스로 직접 체험하기를 포기하면서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있는 것은, 베버가 보기엔 아이를 매개로 부모가 갖게되는 이러한 초월적 바램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실지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이런 초월적 바램을 매개로 서로 관계 맺는다. 아이가 없는, 혹은 아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계획이 자신의 죽음까지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면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그것은 자신의 죽음의 차안에로까지 나아간다.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 이후의 시간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공허한 시간이라면,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시간은 아이들의 삶의 시간이 이루어지는, 바램과 희망, 그리고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를통해 부모는 스스로는 살아서 체험할 없을, 자신의 죽음 이후의 시간에 이루어질 (혹은 이루어져야할)  바램과 희망의 충족을 시간을 앞당겨 미리 기뻐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시간에 이루어질지 모를 어떤 재앙과 고통을 미리부터 걱정한다.

 

이를통해 부모들에게서 현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신의 삶의 시간을 넘어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미래의 희망과 바램,  재앙과 고통에 대한 근심으로 채워져있으며, 이를 의식하는 자식들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현재가 바로 현재를 위해 포기되었던 과거의 바램과 희망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의 현재 속으로 유예된 과거의 바램과 희망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엔 보이지 않는 메시아적 묵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두번째 테제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로체는 "인간 심성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개인들에게 존재하는 저 큰 자기욕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재가 그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 질투심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 생각을 좀 더 진전시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이 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그림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삶의 과정이 언젠가 우리에게 지시했었던 시간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질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행복은 우리가 숨쉬었던 그 공기 속에, 우리가 말을 걸 수도 있었을 사람들과 우리 품에 안길 수도 있었을 여인들과 함께 숨쉬었던 저 공기 속에만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행복의 표상 속에는 구원의 표상이 포기할 수 없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과거에 대한 표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인덱스를 지니고 있는데 그를통해 과거는 구원을 지시하게 된다. 저 과거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 숨의 공기가 우리 자신을 스쳐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목소리 속에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의 메아리가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연연해하는 저 여인들에겐 그녀들이 더 이상 알지 못했던 누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엔 어떤 비밀스런 묵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기다려졌던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우리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과거가 그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있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다.“[2]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바램과 희망을 지금 현재의 삶에서  충족하고 체험하기만을 원할수록,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있는 초월적 시간 대신에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현재의 시간만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등장할 수록, 저 메시아주의적, 초월적 바램을 가능케 했던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는 내적으로 해체되어갈 것이다. 그를통해 우린 더 이상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을 우리의 삶의 계획에 넣지 않으며, 더이상 우리의 현재 속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을,  침묵해버린 과거의 바램들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우리의 현재를 향해 유예시켰던 구원의 요구들은 저 비밀스런 묵계를 파기하는 우리에 의해 망각될 것이며, 그와 더불어 우린 더 이상 과거에 의해 이 땅에 기다려졌던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희미한 메시아적 힘, 아이를 낳고 기르기를 힘들게 하는 사회적 조건 하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며, 우린 모든 차안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재 속에서 갇혀 살아가야 할 것이다.

 

    


[1] Max Weber : Wirtschaft und Gesellschaft. § 8. Das Problem der Theodizee, S.492.

[2] Walter Benjamin :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