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보험과 자본주의적 안심 2000.8.17

김남시 2006. 2. 17. 05:29
아가 젖병을 씻기위한 젖병세정제를 구입하다 세정제 겉봉에 쓰여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였다.
'배상책임보험 1억원 가입, 안심하고 사용하세요!'

이 글을 읽은 순간 내가 받은 혼란스러움을 정리해보자. 어떻게 하면 '안심'하고 젖병 세정제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이 젖병 세정제가 아가가 마시는 젖병을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세척해줄 수 있다면 난 안심할 것이다. 혹 세정제가 남아 아가가 우유와 함께 마시게 되더라도 아가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만들어 져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난 안심하고 이 세정제를 사용할 것이다. 더 욕심을 내자면, 본 세정제와 함께 하수구로 흘러내려가는 물이 수질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재료들로 만들어져있을때 난 더더욱 안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정제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안심'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 세정제가 아가 젖병에 남아있는 세균과 병균들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해 아가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을 경우 -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경우에만 - 혹은, 남아있는 세정제를 아가가 마시게되어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거나 심한 경우 생명이 위태롭게 될 경우에도, "안심하십시요, 여러분. 본 세정제는 1억원의 배상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아가가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경우 우린 최고 1억원까지 보상해드립니다.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라고 말하는 종류의 안심...

자, 그렇다면, '안심하고 사용하세요'란 문구의 의미는 '본 제품의 안전성에 대해선 확신할수 없으나 본 제품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경우 충분히 보상해줄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유예된, 혹은 자본주의적으로 변질된 '안심'의 메커니즘. 사람 한명이 죽거나 팔다리가 절단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더라도 이 모든 것이 '돈'으로 충분히 보상될 수 있다는 믿음. 몇푼의 보상금으로 잘려나간 노동자의 손가락에 대한 책임을 완수했다고 자만하는 뻔뻔스러움...  

생각해보면, 사실 본 제품을 사이에 둔 사용자와 제조회사 중에서 이를 통해 '안심'할 수 있는 쪽은 제조회사에 다름 아니다. 1억원의 배상책임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세정제 회사는 본 세정제의 사용자가 입을지도 모를 피해에 대한 보상책임을 보험회사에 떠 넘길수 있기 때문이다.        

둘러보니 우리 주위엔 우릴 '안심'시키기 위해 이러한 메커니즘을 활용한 수많은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1억원 보상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정수기, 갖고놀다 다칠경우 보상해주는 장난감들...

보험이라는 자본주의적 안전장치는 우릴 어떤 경우에라도 안심하고 살아갈수 있게한다. 난 '안심'하고 차를 운전할 수 있는데, 그건 차를 몰다 다른 사람을 치거나 사망케했을 경우 보험 회사가 그를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난 '안심'하고 '무리하게, 과로해가며' 노동할 수 있는데 내 몸이 탈이나거나 심지어 죽게되는 경우 보험회사가 그를 충분하게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보험은 인류를 인류의 오랜 걱정거리들 - 내가 사고를 내지 않을까, 아이가 다치거나 죽게되지 않을까, 그/그이가 병에 걸리거나 다치치는 않을까. 우리집이 불에 타버리지는 않을까 등등 - 로부터 해방시켜주려는 원대한 기획으로 출발하였는 바, 그러나, 그것이 효력을 갖기 위해선 우리가 살면서 맞이할 삶의 곡절들이 손해/보상이라는 자본주의적 틀로 재편성되어야만 한다.

평생 벌어도 쥐어보지 못할 보험금을 위해 차라리 자기 목숨을 던지는 샐러리맨의 비극이나 자식의 손을 잘라 보험금을 타내려는 아버지, 손자를 독살시켜 보험금을 받으려 했던 할머니...
이미 우리의 삶은 충분히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