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아이와 시간에 대한 강박 2005.3.27

김남시 2005. 10. 30. 05:05
아이들과 저녁 시간을 보내는 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난 저 영화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빨리 알고 싶어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영화가 끝나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자러가야할 시간까지 그 아이들과 씨름하며 보내는 시간은 내게, 한편으론 어서 빨리 지나 버려야 하는, 그리하여 치루어야 할 여분의 시간이다. 마치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지리하게 보내어야 할 이동시간을 보내듯, 난 어서 빨리 아이들이 잠잘 시간이 다가오기를, 그들이 혹 그 전에라도 빨리 피곤해져서 잠이 들어 우리에게 예기치 않았던 자유시간을 던져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또한 아이들과 놀면서, 그들과 씨름하면서 난 이 아이들이 모두 자러 들어가고 나면 맞이해야 할 혼자만의 이 황량한 시간을, 모든 것을, 모든 일을,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올리고, 처리하며,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책임의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걸 예견하고, 저 아이들과 함께 어쨋든 함께 치루어야 하는 이 시간이 연장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내겐, 내가 아이들을 가진 부모인한 어쩔수 없는 시간으로, 내 자신에게, 내 운명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 그런 당연한 시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나의 강박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매분 매분, 하루 하루의 시간을 나 자신에게 정당화시켜야 하는 저 피곤한 관습은, 아마 고3때, 뒤늦은 수험준비를 통해 쌓여진 질긴 강박에서 연유할 것이다.

난 시간을 허투로, 함부로, 쓸데없이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강박. 내가 사용하는, 결국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 시간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정당화시켜야만 되는 저 강박. 최소한 나 자신에게 이 시간은, 지금의 시간은 어떤 점에서 내게 ‚필요한, 요구되는, 어쩔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설득시켜야 하는 강박.

이 강박은 내 삶의 시간의 제한성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으로부터 온 것도, 그렇다고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그렇게 생산적으로 쓰지도 못하는 나의 도덕적 지향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루 하루의 시간을, 지금, 현재의 시간들의 ‚유용성’을 내 삶의 긴 전망에서부터 길어오지 못하는, 그리하여 그때 그때의 시간, 곧 그때 그때의 삶을 단지 내 자의적인 강박에 의해 규제하려고 하는, 그를통해 내 삶을, 나 자신을,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 명분을 얻고자 하는, 내 삶의 태도와 관계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의 경우 내 목전에 놓여있는 내가 ‚해야 할일’, 혹은 내가 하고 싶은일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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