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타자이면서도 타자일수 없는, 아이들

김남시 2006. 1. 19. 07:53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관계는 존재론적 무책임함으로 가득차있다. 나는 아이들의 존재를 세계 존재로 던져놓은’ geworfen 장본인이면서도, 아이들이 자신의 열려진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펼쳐나갈 그들의 자체를 끝까지 돌보아 수도 없다.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 의해 세계에, 그들에게 어떤 악하고, 고통스러우며, 힘겨운 삶을 제공할지도 모를 열려있는 지평 속에 던져져 버렸고, 나는 내가 이렇게 저질러 놓은 아이들의 현존재가 현존재의 가장 외적인 가능성,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동반하지도 못한 무책임하게 그들의 삶의 지평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부모로서의 나는 스스로가 세계에 던져진 존재Geworfen-sein 뿐만 아니라, 다른 현존재를 세계에 던져놓은 존재Geworfen-Haben-Sein 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부모인 나에겐 자신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가 내가 무책임하게 세계 속에 던져놓은 아이들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Sorge 중복되어 다가오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의 In-der-Welt-Sein 으로서의 불안Angst 아니라, 아이들의 현존재에 대한 염려 Sorge 운명적으로 떠안아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세계 존재로서의 나를 무력하게 하는 존재론적 무책임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바로, 아이들의 현존재로서의 가능성이 나의 현존재의 현실적 조건들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내가 처해있는 나의 삶의 모든 조건들에 의해서 그들 현존재의 가능성들을 규정받는다. 그들이 던져지는 세계는, 모든 이들이 완전히 처음부터 자신의 현존재의 가능성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공백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나의 현존재에 의해 마련되어 있는 현실적, 제한적 조건들의 세계다.

나는 내가 처해있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로 인해 아이들에게 나은 교육을 시키지도, 나은 환경과 도구들을 마련해주지도 못한다. 나는 내가 처해있는 삶의 조건들로 인해 아이들에게 넓은 세계의 가능성들을 보여주지도, 많은 능력들을 발양시키게 하지도, 훌륭하고 효과적인 삶의 자격들을 갖추게 하지도 못한다. 모든 제한들은 세계 존재로서의 저들이 자신의 삶을 펼쳐 나가는데 있어서, 그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한계로, 장벽으로, 경계로 작용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아이들을,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계에 던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결국 나의 현존재에 의해 조건지워진 제한된 삶의 가능성들 속으로 가두어 놓음으로써 또다시, 그들 존재의 가능성들을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로서의 나는, 과연 어떤 자격으로 아이들을, 결국 죽음으로 종결되는 세계 존재로 던져놓을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어떤 자격으로 이렇게 세계 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삶의 가능성을, 내가 처해있는 현실적 삶의 조건들로 인해 또다시 제한시킬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와 제한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그들을 세계 속에 던져놓은 나의 삶의 한계와 제한 때문에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주어져 있을지도 모를 나은 삶의 가능성이, 나의 제한된 가능성으로 인해 아예 처음부터 봉쇄되어 버린다면? 다른 현존재에 대한, 이러한 무의지적인 선규정 Vorgriff 도대체 어떻게 윤리적으로 정당화 있을까?

부모에게 있어서 아이는 그들 현존재의 조건이 현존재의 조건들에 의존해 있지 않은, 그리하여 나에 의해 완전히 흡수될 없는 타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또한 내가 더이상 세계 존재임을 멈추고 나서도 한동안 세계 존재로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의 현존재가 다다를 없는 존재론적 타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이들을 타자이면서도, 또한 완전한 타자이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