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삶

진리의 진리성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김남시 2006. 4. 1. 02:50

 

진리는 그를 누가 주장하든 진리일 수 있을까. 진리는 그 진리를 누가 이야기하건 상관없이 독립된, 그 자체의 자기 진리성을 가지고 있을까. 진리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대변되든, 어떤 이가 그를 전파하고 다니든 스스로 진리라고 하는 객관적 진리성을 담보하고 있을까. 진리 개념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객관적 진리성에 대한 요구는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진리에 대한 또다른 태도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다. 진리는 그를 주장하고 대변할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해 대변될 때에만 비로소 진리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태도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법칙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진리가 갖는 설득적 힘이 진리 자체의 진리성이 아니라, 그를 대변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Ethos에 의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말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위해서는 사려분별 good sense, 덕목 Ethos, 그리고 선한 의지 goodwill 가 필요하다. 사려 분별을 결여하고 있다면 연사의 말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 될 터이고, 선한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면 그 연사는 올바른 것을 알고있다 하더라도 최선의 충고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1] 끝으로 우리의 삶과 관습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Ethos 적 덕이 연사에게 결핍되어 있다면, 청중은 그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동일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살인자보다 예를들어 종교지도자가 하는 말을 더 신뢰할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저 Ethos를 갖추고 있지 못한 자에 의해 진리가 설파된다면, 그 진리는 스스로의 진리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 진술의 합리성을 판정하게 하는 암묵적 타당성 요구에, 그 진술 자체의 진리성과 정당성 뿐 아니라, 그 화자의 진실성 Wahrhaftigkeit 타당성 요구까지를 포함시키는 하버마스[2] 역시 한 진술이 상대방에 의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가능성이, 다만 그 진술의 내적 타당성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동과 삶 자체에도 의존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진술의 진리성을 그 화자의 과거의 삶과 행동과 연결시키는 이러한 생각은, 다른 한편으론 특정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예 진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해 버리는 부당한 사회적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일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하더라도 저명한 대학 교수의 그것과 대학 졸업도 못한 무명 발명가의 주장은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나아가 정치적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주장은, 많은 경우, 그 주장 자체의 진리성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결핍하고 있는 자격조건에 의해 거부 당한다.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이처럼 한 진술의 진리성을 그 진술 자체의 타당성이 아니라, 그를 말하는 화자의 삶, 그의 과거와 경력 등에 근거해 판정하는 한, 우리는 진리의 진리성을 우리 스스로가 만든 사회적 제도와 장치들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주장하기 보다 먼저 그를 위한 사회, 제도, 정치적 자격 -  학위, 업적, 경력 등 을 얻기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리의 진리성을 그를 말하는 사람의 자격과 연결시키는 이런 생각이 그 말하는 자의 도덕적 윤리성을 진리를 말할 자격조건으로 끌어들이면서,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심대한 부정적 결과를 낳았는데, 우린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의 씨앗을 이미 신약성서에서 부터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간음한 여자를 관습에 따라 돌을 던져 처형하려던 사람들을 « 스스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라며 가로 막음으로써 예수는, 진리를 주장하고 대변할 수 있는 자격에 그 사람의 윤리적 도덕성을 추가시켰다. 이로써 죄지은 자에 대한 처벌의 요구는 스스로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윤리적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고, 스스로 죄가 있는 모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남의 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판할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미 태어나면서 부터 원죄의 운명을 짊어지고, 또 늘 스스로 죄인임을 의식하도록 강요받는 기독교적 인간들에게 이제 타인의 잘못과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 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 » 라는 신약의 구절을 통해 드러나는 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는 상대를 비난하는 중요한 논증으로 사용되었다. 스스로가 신의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카톨릭과 개신교는 이를통해, 서로에 게 진리를 대변할 자격을 박탈하는 방식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 했는데, 이런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사회적으로는 진리가 결국은 그를 주장하는 자들의 이해관계에 달려있을 뿐 이라는 진리에 대한 냉소주의적 태도로 이어지게 되었다.[3]    

 

« 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를 놀린다 » 등의 속담에서도 보이듯 우리 사회에도 깊이 뿌리내린 이러한 사고를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모든 사회, 정치, 문화적 논쟁들 속에서 재발견한다. 그 논쟁들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의 진술 자체의 진리성을 따지기 보다는 그 진술을 행하는 사람에게서 그를 주장할 자격을 박탈시키는데 더 매달린다. 상대의 교육정도, 그의 과거의 경력과 행적들을 캐내어 폭로하고, 상대의 진술을 그의 출신지역, 학교, 그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로 연결시키는 태도들은 상대의 진술의 진리성을 다만 그 상대의 삶의 연관들로 환원시킴으로써, 이러한 논쟁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모든 주장의 배후엔 그 주장 자체의 진리성이 아니라 다만 그를 주장하는 측의 이해관계만이 숨겨져 있다는 냉소주의적 진리관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언어적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삶의 과정이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 자체를 그 속에 포괄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대화와 소통으로부터 그 소통 외적인 삶과 말하는 자의 육체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들은 모습을 바꾼 실증주의적 관념론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주장과 진술이, 다만 그 주장을 한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위치와 조건에 따라서 혹은 그의 과거 때문에, 나아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출신배경 때문에 그 타당성과 합리성이 의심된다면, 이는 말하는 자에게 원죄를 들쒸움으로써 대화와 소통이라는, 그 자체 해방적 계기를 지니고 있는 인간행위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진술의 진리성을 진술자와 연관시키려는 것이 보수적 이데올로그의 주요 전략[4]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말은, 어떤 언어 외적 연관 없이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근거지운다. 속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약함과 강함은, 그 말을 진술한 행위자 속에서가 아니라 다만 말해진 속에서만 찾아지고 발견되어야 한다. 진리는 아이디어로 구성되어 있는 의도없는 존재다...진리는 의도의 죽음이다.“  „Die Wahrheit ist ein aus Ideen gebildetes intentionsloses Sein....Die Wahrheit ist der Tod der Intention.“[5]       

 

  



[1]  Aristotle : The „Art“ of Rhetoric, 1878 a, tras. John Henry Freese, Cambridge, Massachusetts 1975.

[2] Jürgen Habermas :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3] 이에 대해선 Peter Sloterdijk : Kritik der zynischen Vernunft.

[4] 예를들어 Peter Schweizer : Do As I Say (Not As I Do) : Profiles in Liberal Hypocrisy.

[5] Walter Benjamin : Erkenntniskritische Vorrede, GI 1, S.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