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삶

"통찰의 의사소통" 과 인간관계

김남시 2006. 12. 9. 06:23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의사소통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하나가 실려있다. 작고한 조선일보 컬럼니스트 이규태가 <헛기침으로 백마디 말을 한다> 제목의 글이다. 여기서 그는 소위 말없는 통찰의 의사소통, „통찰을 필요로 하지않는 말로하는 의사소통 대조시키면서 전자를 한국적 의사소통의 특성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런 소통의 사례로 그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며느리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다림질을 하고 있다. 방에 있던 시어머니가 말을 건네온다. „아가, 할미가 업어줄까?“ 말은 할미가 젖을 빠는 손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비가 뿌리는 밖에 널려있는 빨래를 빨리 거둬들이라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분부인 것이다. 며느리는 말을 통찰력으로 알아듣고 빨래를 거둬들인다. 텃밭에 남새 뜯어 국거리 마련하랴, 저녁밥 지으랴, 애들 돌보랴, 일손이 바쁜 며느리는 시어머니 담배 피우고 있는 앞에서 강아지 배를 깨깽거리게 하거나 마루에서 노는 닭들에게 앙칼스레 욕을 퍼붓는다. 시어머니는 ‚옳거니.’, 통찰로 뜻을 알아차리고  바구니 들고 남새 밭에 가면 되건만, ‚그렇지 않아도 쉬었다가 텃밭에 가려고 했는데 강아지 배를 .... 어디 가나보라.’ 버티고 있으면 며느리는 업힌 아이보고, „ 어머니는 무슨 팔자로 손이 달려도 모자라냐.“ 혼잣말을 한다.>

 

한국의 토착 1세대 문화학자라 불릴만큼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회, 문화적 현상들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왔던 이규태가 글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는 소위 통찰의 의사소통 서구의 소통이론, 구체적으로 니클라스 루만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우린 가지 숙고해 만한 사실을 발견할 있다. 위의 예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위 통찰의 의사소통에선 상대가 나를 향해 전달한 발화된 언어행위자체보다 그가 나를 향해 발화하지 않은(못한), 그러나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을 은폐된 언어행위 대한 추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통찰의 의사소통에 성공하기 위해선 우린, 나를 향해 발화되지 않은 상대의 말과 행동   표정, 제스쳐, 목소리 등등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로부터 상대의 숨겨져 있는 메시지를 헤아려   있어야 한다. , 상대의 내면에 대한 통찰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나라라는 집단까지 한국인은 너무 많이 통찰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있다...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피는 장작불의 조잡함에서, 며느리가 먹인 시어머 삼베고쟁이의 칼날같이 뻣센 풀에서 며느리의 반항을 통찰할 알아야 한다. 며느리가 업고있는 아이의 울음의 질과 시간과 때와 경우를 판단하여 며느리가 아이 엉덩이를 꼬집어 울린 건지 아닌지를 통찰로 감식할 알아야 한다.>

 

의사소통에 대한 이와는 다른 태도를 우린 니클라스 루만의 소통이론에서 찾아 있다. 니클라스 루만은 의사소통 (Kommunikation) 타인의 행동에 대한 단순한 지각 구분한다.[1]  그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을 향해 발화되지 않은 상대의 행동을 지각하고 이를 이후 그와의 의사소통 시에 고려할 있는 정보 Information’ 채택할 수는 있지만, 지각과 관찰만으로 그와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나, 먹이를 들고 기어가고 있는 개미를 보고 얻은 정보를 가지고 우리가 나무 혹은 개미들과 의사소통했다고 말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타인이 자신의 특정한 행동과 말을 의식적으로 나를 향해 전달 Mitteilung’ 했을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가 지각한 그의 행동은 우리에게 의사소통적 실재를 갖지 않는 심리적 사건 다름 아니다. 그와의 의사소통이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가 그의 행동에 대한 지각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우리는 확증하거나 반박하지도, 물어보거나 대답하지도 못한다. 그건 의식 속에 폐쇄된 머물러있으며 의사소통 시스템 자체에는 물론 다른 의식에도 불투명하다.“[2] 

 

타인의 행동에 대한 지각과 그와의 의사소통, 나아가 지각으로부터 얻어진 정보 자신을 향해 구체적으로 실행된 전달’ (행위) 구분하는 소통이론에는, 독립된 의식을 갖는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다만 외적 환경세계 Umwelt 일부로만 관계하는 개인주의적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관은 상대가 나를 향해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전까지 내가 그의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얻은 정보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상대는 내가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와는 전혀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설사 그의 의식이 내가 얻은 정보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는 그걸 내게 전달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 나를향해 전달되고 발화되지 않은 타인의 의식을 다만 그에대한 지각을 통해 통찰하려하는 것은, 그것이 그와의 의사 소통을 통해 확증, 반박 혹은 발전되지 않는 상대를 지각과 해석의 대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다. 상대는 나에대해 기분이 나쁠 수도, 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감정을 나를 수취인으로 의식적으로 전달하기 전까지는 그건 전적으로 그의 의식 속에 폐쇄된 머물러 있는 것으로, 그리하여 내겐 불투명하며, 불투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에반해 소위 통찰의 의사소통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지 않는(못하는) 상대에 대한 헤아림과 배려(통찰!) 원리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이런 통찰에의 요구는 개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공동체적 규범 등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등장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학생과 선생, 후배와 선배, 부하 직원과 상사 사이를 규제하는 공동체적 규범이 서로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전달의 가능성을 보장해 주지 못할 ,  그리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체, 치환,  환유 등의 방식을 통해서만  표현할 있을 통찰 의사소통의 필수 덕목으로 요구된다.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의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통찰하기 위해 요구될 뿐만 아니라, 낮은 지위의 사람이,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는 상사, 선생, 부모, 선배의 요구들을 통찰 그를 실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특정한 공동체적 규범을 필요로 하는 , 모든 강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상적 의사소통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나아가 우리의 일상적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무런 발화 수반적 지표’ (Markierung) 없이 직접 내용만으로 전달되는 순수한 정보교환의 모델에 따라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사랑에 대한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예를들어 사랑은 내가 상대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자체를 전달하려는, 모순적 커뮤니케이션 요구에 의해 지배[3]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저 통찰의 능력은 이 곳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저 통찰의 의사소통이 의지와 상관없이 강요되는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상대와 소통하고,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둘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를 빼앗기게 되며, 이를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의사소통의 주체가 되기보다 거꾸로 그 의사소통에 의해 지배받는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며느리는 자신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러나 시어머니에 의해 통찰당한’ ‚생각욕구때문에 더 큰 미움을 살 수도 있고, ‚전달이 아니라 통찰 당하기만을 바라고 있는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것이다. 서로가 원하는 만큼의 통찰, 서로에게, 그것도 말없이 보장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통찰의 의사소통은 서로에 대한 이해보다 오해를 가중시키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들 것이다.

 


[1] Niklas Luhmann : Was ist Kommunikation? In Aufsätze und Rede, Stuttgart 2001, S.97 ff.

[2] Niklas Luhmann : Was ist Kommunikation? In Aufsätze und Rede, Stuttgart 2001, S.98.

[3] Vgl. Niklas Luhmann : Liebe als Passion. Zur Codierung von Intimität. Frankfurt am Main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