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Georg Simmel의 다른 글 "Die Asthetik der Schwere"를 번역해 싣습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글은 아니네요. 쩝 ~~)
무게의 미학 Georg Simmel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과 관계들은 우리에게 어떤 압박으로만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삶의 질료들이 우리에겐 우릴 구속하는 실제성과 난폭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린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비로소 영혼의 완전한 자유가 펼쳐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우리가 자연과 사회로부터 체험하는 이 강제들로 인해 우리는 - 전체로서건 개인으로서건 간에- 종종 사물들의 그 완고함과 저항이 없다면 우리의 내적 삶을 완성시키고 자신을 각인시킬 아무런 질료도 갖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만일 대리석이 아무 저항도 갖지 않는다면, 조각가는 대리석에 어떠한 형태도 새겨넣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자유는 영혼을 구속하는 외부 세계의 고유한 법칙성에 따라서만 활동적이며, 그와 더불어서야 비로서 실제적인 삶을 산출해낸다. 나아가 우리의 도덕적 충동들은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본능의 원재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본능들과의 끝없는 싸움과 정복, 그리고 그 변형 속에서야 비로소 도덕적 충동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내적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자신만의 완전한 삶의 완성을 지향하는 자아와 그를 구속하는 힘들 사이의 대결 속에 존재한다. 만일, 자아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그 구속하는 힘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자신을 특정한 형태로 형성시키는데 필요한 삶의 모든 질료와 가능성 또한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특유한 운명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도 적용된다. 우리들 팔 다리의 움직임은, 우리를 아래로 잡아끄는 물리적 무게와 그러한 육체의 중력을 견디고 그를 벗어나려 하는 영혼의 생리적 충동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상태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 신체의 운동은 바로 이 투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의지는 물리적 에너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범과 방향에 따라 사지를 지배하는데, 의지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신체는 매 순간 이 두 에너지 - 물리적 에너지와 의지 - 가 서로 충돌하고, 비껴가며, 타협해야 하는 투쟁의 장이 된다. 제지받은 물질적 저항들이 내적인 운동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이 저항은 그때 마다의 영혼의 현시를 조건 지우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그 저항에 맞서서 만이, 그 저항을 극복하는 속에서만이 운동이 완성되고 영혼의 의미가 눈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힘들이 맞서서 한 힘이 다른 힘을 꺽고 방해하거나 때에 따라선 다른 힘을 촉진시키고, 그 힘을 회피하거나 양 힘들을 다양하게 혼합시켜 통일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때마다의 방식들이 다양한 예술 양식 속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전형들을 규정한다. 예를들어, 그리스 조각과 바로크 회화를 비교해보면, 우린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무게를 극복하는 것이 오랜 기간동안 수월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인간 형상이나 대리석 조각에 있어서 그 질료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재료의 물리적 조건들을 가지고 유희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것들이 마치 아무데서나 우리가 불어넣을 수 있는 공기인 양, 질료들에 대한 어떤 저항도 느끼지 않고 있으며, 그를 인간의 내적 충동에 절대적으로 굴복시키듯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은 고전예술 만큼 정신적이고 내부로부터의 생명감에 차있지 못한데, 이는 재료의 저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수록 좋을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만 영혼이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을 수 있는 필수적 질료이자 대상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그 주름과 늘어짐, 흔들림과 부풀어오름 속에서 저 힘들의 싸움을 드러내는 상징인 것이다.
일본 나무 조각에 새겨진 인물상에는 놀랄만한 파격이, 곧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게 여겨지던 형태의 돌출과 은닉이 드러나 있는데, 이 육체들 속에선 지상의 무게와 영혼의 충동이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혼합되고, 충동을 통한 무게의 극복 역시 완전히 낯선 리듬과 충돌 그리고 굴복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선, 인간에게 있어 본질적인 측면 곧, 인간이 영혼의 에너지를 근원적으로 주어진 자연에로 불어넣는 방식 -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반면, 자아는 그로인해 쫓기고 방해받게 되는 - 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술가들이 예술 속에서 이 본질적인 것 즉, 영혼의 에너지를 자연에로 불어넣는 것을 시각화시키는 모습은 매우 다양한데, 이는 그 통일의 요소들인 물리적인 것과 심리-생리적인 것이 서로 완전히 다른 비례와 변형에 따라 관계맺기 때문이다. 개별 예술가가 인간 형상을 만드는 개성적 양식 또한 이러한 '대립(안타고니스무스)'를 대하는 그의 독특한 공식을 통해 규정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우리는 모든 신체들이 하나의 압박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느낀다. 곧, 어마어마한 무게가 그 신체들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어 그들은 그에 맞서 자신들을 지탱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하고 고통스러운 힘을 소모해야만 한다. : 자연 존재의 원초적 무게 - 내적 구속이라는 어두운 비극을 상징하는 - 로부터 해방되려는 영혼의 싸움이, 그 두 방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지점에서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부터 확립된 그 양 힘들의 균형이 후대의 예술들 속에서 동요되어, 그저 무게를 무시해버림으로써 영혼의 자유와 충동성을 표현하려 함으로써 이제 미켈란젤로의 양식은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해가게 된다.
물리적 무게와 그를 극복하려는 영혼의 분투 사이의 완전히 독창적인 관계가 Konstantin Meuniers 작품의 양식을 특징 지운다. 그의 조각은 완전히 새로운 문제, 곧, 노동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를 예술 속에 도입하였다. 그는 노동의 형식적-미적 가치를 그 자체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똑같이 노동하는 민중을 그렸지만, 노동하는 모습을 인간의 감정과 성격 속에서만 표현하고 그 윤리적 혹은 정서적 의미를 완전히 넘어서 있는 순수한 직관적 의미를 표현하지는 않았던 밀레나 다른 화가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최초로 노동을 그 심미적 측면에 의해 가치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중세 도시 시민들이 노동을 그 사회적 측면에 따라 가치있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과 같다. 고대로부터 노동에 결부되어 있었던 굴욕적 개념을 노동으로부터 풀어냄으로써, Meunier는 노동의 결과나 그 과정에 존재하는 모든 미적-무관심과 불쾌함을 노동으로부터 벗겨내고 처음으로 노동하는 운동을, 휴식하거나 놀고 있거나 아니면 정서적으로 자극되어있는 육체를 그려내던 것처럼, 인간 육체에 미적인 형상을 부여하는 것으로 다루었다. Meunier가 자신의 인물들로 하여금 몸을 일으키고, 끌어당기거나 늘어뜨리며, 노를 젖게 하였을 때, 육체의 무게는 바깥을 향해 뻗어 죽은 재료 속에로 나아가는데, 거기서부터 힘을 통해,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을 통해 육체의 무게를 극복하려는 놀랍고도 완전히 독특한 요구가 드러나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 운동은 우리가 철강 노동자와 재단사, 이발사와 광부 등 무수히 다양한 종류의 노동 속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켜 주는 동류의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된 사정과 관계 깊다. 이전에는 노동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통일성과 동일함을 인식할 수 없었는데, 사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임금 노동자들인 것이다. Meunier는 노동의 이러한 개념적 동일성을 미적 동일성으로 형상화시켰다. 노동은 매우 다양한 힘의 정도와 매우 다양한 근육들을 요구할지는 모르나, 생명력 있는 육체가, 육체의 목표에 맞서는 재료의 저항을 통해 그 육체에 제기되어 있는 과제와 관계 맺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노동은 재료 속으로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인데, 그를통해 노동은 물리적 무게와, 그 물리적 무게에 저항하는, 우리의 모든 운동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충동들 사이의 투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은 인간 육체의 경계 속에 머물러 있는 바, 노동은 우리 영혼과 생리적 경향들이 질료의 딱딱함과 무게, 완고성에서 맞닥뜨리는 물리적 저항들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Meunier의 브론즈들이 비로소 처음으로 예술의 언어를 통해 노동이 무엇인가를, 노동하고 있는 인간이 단순한 재료의 힘들을, 그에 맞서 싸우는 의지의 산물로 변형시키는 관계를 위한 보편적 공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은 무게의 계기와 그에 대항하는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그 자체가 무게를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재료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대들보의 무게에 대한 기둥의 지탱력을 결정할 때 어느 정도는 속으로 추정하는 직접적 느낌을 통해 두 힘의 적절함을- 마치 그 힘들이 우리 속에서 그들의 대립을 조정하듯이 - 결정할 때처럼 우리는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리석은 이러한 점에서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대리석의 흰색과 그 광택은 돌의 무게를 약화시키고 그를 정신화 시킨다. 대리석은 공간처럼 객관적인 어떤 것을 갖는데, 말하자면 대리석은 신체로서의 단순한 공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조각은 가장 유연하고, 형상과 힘들의 모든 관계에 가장 잘 순응하는 재료를 대리석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 반면 나무와 자기, 청동들에는 이미 특별한 그 재료에 고유한 무게의 관계들이 강하게 투사되어 있다. 따라서,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은 어떤 내적인 힘이나 생동감을 통해서도 그것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을 극복하기가 거의 힘들기 때문에 다만 특수한 상황하에서만 미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자기로 만든 인물상은 쉽게 바로크적 인상을 풍길 수 있는데, 그것은 재료의 무게 - 극복해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은 - 에 비해 그 조각의 운동성이 거의 언제나 그를 넘쳐흐름으로써 힘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대상물들에서 드러나는 우아(Anmut)와 품위(W rde)의 대립 역시 영혼-신경 에너지가 재료의 압박과 관계하는 다양한 관계들로 귀착된다. 이 두 존재형식 속에서 형상들의 물질적 무게는 영혼을 부여받은 운동에 의해 극복되는데, 그 중 우아는 재료의 저항을 처음부터 무시함으로써 이를 이루어낸다. 그것은 힘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요구를 감소시킴으로써 운동이 아무런 저항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여기선 마치 영혼의 자유만 존재하여 외부로부터의 모든 장애물들은 다만 영혼의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듯 하다. 이와는 달리 직관적 품위는 영혼-생리적 힘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달성함으로써 이를 성취하는데, 그것은 저항들의 무게를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영혼-생리적 힘들을 완전히 부각시킴을 통해서이다. 우아함이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여기에서 유일한 대적 상대는 이미 스스로 무화되어 버린 저항의 조용한 암시일 뿐이다. 품위는, 무게를 지우고 아래로 이끌고 가려는 현상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두는데, 아니 오히려 그를 넘어 붙들기 위해 그리고 극복된 상대의 강함에 대해 영혼의 힘의 승리를 느끼게 하기 위해 그를 더욱 강조한다.
도덕적 삶 속에도 이에 정확히 대응하는 이원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최상의 단계를 도덕적 "성취(Verdienst)"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감각적인 것의 모든 유혹과 에고이즘의 모든 저항들을 힘겨운 투쟁을 통해 극복하고 죄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강력함에 맞서 강력한 의무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의 도덕성을 자연적 충동의 자명성으로부터 솟아 나오게 함으로써 도덕적이 된다. 그것은 미덕을, 마치 애초에 극복되어야 하는 악자가 죄악을 향수하듯 향수하기 때문에, 극복해야할 어떠한 유혹들도 갖지 않으며, 악을 향해 끌어내리는 대립적 힘이 여기에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도덕적이다.
이 아름다운 영혼의 고유한 특성이 도덕적 우아함이다. 직관적 우아함은 곧 영혼의 자유가 단순한 질료들의 어두운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에게 안겨준 승리의 저 자명성에 다름 아니다. -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승리는 안겨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반면 저 더 깊고 더 무거운 영혼의 고유한 특성이 품위이다. - 즉, 쓰디쓴 자기 극복을 넘어서 유혹과 지극한 세속성의 모든 어두움을 넘어서 영혼에 자아와 영혼의 자유를 구해준 그 영혼에는 약함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들의 가장 강함에 대해 승리를 거둔 품위가 귀속되는 것이다.
내가 스케치 해보려 시도했던 이 두 에너지의 대립과 투쟁은 인간 영혼과 단순한 자연의 힘 사이의 거대한 싸움의 미적 형식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그 싸움의 정도와 적절함, 승리와 타협, 회피와 첨예화들이 인간의 역사에 그 색채와 가치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 "우아와 품위"에 대하여
"우아와 품위"는 F. Schiller가 1793년에 쓴 "우아와 품위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미적 범주로서의 '우아와 품위'는 쉴러를 비롯한 Lore Shaftesburz, Mendelssohn 등 18세기의 여러 사상가들의 주요 분석의 대상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쉴러는 인간행위의 아름다움을 자연적 천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건축술적(architechtonic) 아름다움과 인간의 의지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이성적 아름다움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감성적, 본능적 욕구와 이성적 의지가 조화된 상태를 이상적 인간의 전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인간의 이 양 충동을 통일시켜주는 원리로 이해됩니다.) 그에게 있어 '우아'는 인간 행위를 추동하는 자연적, 감성적 욕구와 인간의 이성적 의지가 완벽히 조화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행위를 특징지우는 범주입니다. 우아한 영혼 혹은 '아름다운 영혼'이 그의 감정과 욕구와 조화롭게 행위하는 것이라면 '품위'는 우아함을 보충해주는 덕목으로,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드러나는 행위의 특성을 지칭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 세계에서의 인간이라면 우아함만을 필요로 하겠지만, 현실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우아함 뿐 아니라 품위를 통해서 행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쉴러는 우아함과 품위를 이상적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 할 두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전 : Encyclopedia of Aesthetics ,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vol. 4)
*위에서 언급된 화가 미켈란젤로와 바로크의 대표적 예술가 베르니니와 Konstantin Meunier의 작품 사진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글과 비교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0.jpg)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1.jpg)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2.gif)
무게의 미학 Georg Simmel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과 관계들은 우리에게 어떤 압박으로만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삶의 질료들이 우리에겐 우릴 구속하는 실제성과 난폭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린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비로소 영혼의 완전한 자유가 펼쳐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우리가 자연과 사회로부터 체험하는 이 강제들로 인해 우리는 - 전체로서건 개인으로서건 간에- 종종 사물들의 그 완고함과 저항이 없다면 우리의 내적 삶을 완성시키고 자신을 각인시킬 아무런 질료도 갖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만일 대리석이 아무 저항도 갖지 않는다면, 조각가는 대리석에 어떠한 형태도 새겨넣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자유는 영혼을 구속하는 외부 세계의 고유한 법칙성에 따라서만 활동적이며, 그와 더불어서야 비로서 실제적인 삶을 산출해낸다. 나아가 우리의 도덕적 충동들은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본능의 원재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본능들과의 끝없는 싸움과 정복, 그리고 그 변형 속에서야 비로소 도덕적 충동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내적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자신만의 완전한 삶의 완성을 지향하는 자아와 그를 구속하는 힘들 사이의 대결 속에 존재한다. 만일, 자아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그 구속하는 힘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자신을 특정한 형태로 형성시키는데 필요한 삶의 모든 질료와 가능성 또한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특유한 운명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도 적용된다. 우리들 팔 다리의 움직임은, 우리를 아래로 잡아끄는 물리적 무게와 그러한 육체의 중력을 견디고 그를 벗어나려 하는 영혼의 생리적 충동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상태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 신체의 운동은 바로 이 투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의지는 물리적 에너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범과 방향에 따라 사지를 지배하는데, 의지로부터 발생하는 에너지에 의해 우리 신체는 매 순간 이 두 에너지 - 물리적 에너지와 의지 - 가 서로 충돌하고, 비껴가며, 타협해야 하는 투쟁의 장이 된다. 제지받은 물질적 저항들이 내적인 운동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이 저항은 그때 마다의 영혼의 현시를 조건 지우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그 저항에 맞서서 만이, 그 저항을 극복하는 속에서만이 운동이 완성되고 영혼의 의미가 눈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힘들이 맞서서 한 힘이 다른 힘을 꺽고 방해하거나 때에 따라선 다른 힘을 촉진시키고, 그 힘을 회피하거나 양 힘들을 다양하게 혼합시켜 통일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때마다의 방식들이 다양한 예술 양식 속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전형들을 규정한다. 예를들어, 그리스 조각과 바로크 회화를 비교해보면, 우린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무게를 극복하는 것이 오랜 기간동안 수월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인간 형상이나 대리석 조각에 있어서 그 질료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재료의 물리적 조건들을 가지고 유희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것들이 마치 아무데서나 우리가 불어넣을 수 있는 공기인 양, 질료들에 대한 어떤 저항도 느끼지 않고 있으며, 그를 인간의 내적 충동에 절대적으로 굴복시키듯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바로크 예술은 고전예술 만큼 정신적이고 내부로부터의 생명감에 차있지 못한데, 이는 재료의 저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수록 좋을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만 영혼이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을 수 있는 필수적 질료이자 대상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그 주름과 늘어짐, 흔들림과 부풀어오름 속에서 저 힘들의 싸움을 드러내는 상징인 것이다.
일본 나무 조각에 새겨진 인물상에는 놀랄만한 파격이, 곧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게 여겨지던 형태의 돌출과 은닉이 드러나 있는데, 이 육체들 속에선 지상의 무게와 영혼의 충동이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혼합되고, 충동을 통한 무게의 극복 역시 완전히 낯선 리듬과 충돌 그리고 굴복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선, 인간에게 있어 본질적인 측면 곧, 인간이 영혼의 에너지를 근원적으로 주어진 자연에로 불어넣는 방식 -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반면, 자아는 그로인해 쫓기고 방해받게 되는 - 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술가들이 예술 속에서 이 본질적인 것 즉, 영혼의 에너지를 자연에로 불어넣는 것을 시각화시키는 모습은 매우 다양한데, 이는 그 통일의 요소들인 물리적인 것과 심리-생리적인 것이 서로 완전히 다른 비례와 변형에 따라 관계맺기 때문이다. 개별 예술가가 인간 형상을 만드는 개성적 양식 또한 이러한 '대립(안타고니스무스)'를 대하는 그의 독특한 공식을 통해 규정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우리는 모든 신체들이 하나의 압박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느낀다. 곧, 어마어마한 무게가 그 신체들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어 그들은 그에 맞서 자신들을 지탱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하고 고통스러운 힘을 소모해야만 한다. : 자연 존재의 원초적 무게 - 내적 구속이라는 어두운 비극을 상징하는 - 로부터 해방되려는 영혼의 싸움이, 그 두 방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지점에서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부터 확립된 그 양 힘들의 균형이 후대의 예술들 속에서 동요되어, 그저 무게를 무시해버림으로써 영혼의 자유와 충동성을 표현하려 함으로써 이제 미켈란젤로의 양식은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해가게 된다.
물리적 무게와 그를 극복하려는 영혼의 분투 사이의 완전히 독창적인 관계가 Konstantin Meuniers 작품의 양식을 특징 지운다. 그의 조각은 완전히 새로운 문제, 곧, 노동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를 예술 속에 도입하였다. 그는 노동의 형식적-미적 가치를 그 자체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똑같이 노동하는 민중을 그렸지만, 노동하는 모습을 인간의 감정과 성격 속에서만 표현하고 그 윤리적 혹은 정서적 의미를 완전히 넘어서 있는 순수한 직관적 의미를 표현하지는 않았던 밀레나 다른 화가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최초로 노동을 그 심미적 측면에 의해 가치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중세 도시 시민들이 노동을 그 사회적 측면에 따라 가치있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과 같다. 고대로부터 노동에 결부되어 있었던 굴욕적 개념을 노동으로부터 풀어냄으로써, Meunier는 노동의 결과나 그 과정에 존재하는 모든 미적-무관심과 불쾌함을 노동으로부터 벗겨내고 처음으로 노동하는 운동을, 휴식하거나 놀고 있거나 아니면 정서적으로 자극되어있는 육체를 그려내던 것처럼, 인간 육체에 미적인 형상을 부여하는 것으로 다루었다. Meunier가 자신의 인물들로 하여금 몸을 일으키고, 끌어당기거나 늘어뜨리며, 노를 젖게 하였을 때, 육체의 무게는 바깥을 향해 뻗어 죽은 재료 속에로 나아가는데, 거기서부터 힘을 통해,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을 통해 육체의 무게를 극복하려는 놀랍고도 완전히 독특한 요구가 드러나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 운동은 우리가 철강 노동자와 재단사, 이발사와 광부 등 무수히 다양한 종류의 노동 속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켜 주는 동류의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된 사정과 관계 깊다. 이전에는 노동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통일성과 동일함을 인식할 수 없었는데, 사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임금 노동자들인 것이다. Meunier는 노동의 이러한 개념적 동일성을 미적 동일성으로 형상화시켰다. 노동은 매우 다양한 힘의 정도와 매우 다양한 근육들을 요구할지는 모르나, 생명력 있는 육체가, 육체의 목표에 맞서는 재료의 저항을 통해 그 육체에 제기되어 있는 과제와 관계 맺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노동은 재료 속으로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인데, 그를통해 노동은 물리적 무게와, 그 물리적 무게에 저항하는, 우리의 모든 운동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충동들 사이의 투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은 인간 육체의 경계 속에 머물러 있는 바, 노동은 우리 영혼과 생리적 경향들이 질료의 딱딱함과 무게, 완고성에서 맞닥뜨리는 물리적 저항들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Meunier의 브론즈들이 비로소 처음으로 예술의 언어를 통해 노동이 무엇인가를, 노동하고 있는 인간이 단순한 재료의 힘들을, 그에 맞서 싸우는 의지의 산물로 변형시키는 관계를 위한 보편적 공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은 무게의 계기와 그에 대항하는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그 자체가 무게를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재료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대들보의 무게에 대한 기둥의 지탱력을 결정할 때 어느 정도는 속으로 추정하는 직접적 느낌을 통해 두 힘의 적절함을- 마치 그 힘들이 우리 속에서 그들의 대립을 조정하듯이 - 결정할 때처럼 우리는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리석은 이러한 점에서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닌다. 대리석의 흰색과 그 광택은 돌의 무게를 약화시키고 그를 정신화 시킨다. 대리석은 공간처럼 객관적인 어떤 것을 갖는데, 말하자면 대리석은 신체로서의 단순한 공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조각은 가장 유연하고, 형상과 힘들의 모든 관계에 가장 잘 순응하는 재료를 대리석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 반면 나무와 자기, 청동들에는 이미 특별한 그 재료에 고유한 무게의 관계들이 강하게 투사되어 있다. 따라서,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은 어떤 내적인 힘이나 생동감을 통해서도 그것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을 극복하기가 거의 힘들기 때문에 다만 특수한 상황하에서만 미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자기로 만든 인물상은 쉽게 바로크적 인상을 풍길 수 있는데, 그것은 재료의 무게 - 극복해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은 - 에 비해 그 조각의 운동성이 거의 언제나 그를 넘쳐흐름으로써 힘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대상물들에서 드러나는 우아(Anmut)와 품위(W rde)의 대립 역시 영혼-신경 에너지가 재료의 압박과 관계하는 다양한 관계들로 귀착된다. 이 두 존재형식 속에서 형상들의 물질적 무게는 영혼을 부여받은 운동에 의해 극복되는데, 그 중 우아는 재료의 저항을 처음부터 무시함으로써 이를 이루어낸다. 그것은 힘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요구를 감소시킴으로써 운동이 아무런 저항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여기선 마치 영혼의 자유만 존재하여 외부로부터의 모든 장애물들은 다만 영혼의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듯 하다. 이와는 달리 직관적 품위는 영혼-생리적 힘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달성함으로써 이를 성취하는데, 그것은 저항들의 무게를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영혼-생리적 힘들을 완전히 부각시킴을 통해서이다. 우아함이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여기에서 유일한 대적 상대는 이미 스스로 무화되어 버린 저항의 조용한 암시일 뿐이다. 품위는, 무게를 지우고 아래로 이끌고 가려는 현상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두는데, 아니 오히려 그를 넘어 붙들기 위해 그리고 극복된 상대의 강함에 대해 영혼의 힘의 승리를 느끼게 하기 위해 그를 더욱 강조한다.
도덕적 삶 속에도 이에 정확히 대응하는 이원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최상의 단계를 도덕적 "성취(Verdienst)"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감각적인 것의 모든 유혹과 에고이즘의 모든 저항들을 힘겨운 투쟁을 통해 극복하고 죄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강력함에 맞서 강력한 의무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의 도덕성을 자연적 충동의 자명성으로부터 솟아 나오게 함으로써 도덕적이 된다. 그것은 미덕을, 마치 애초에 극복되어야 하는 악자가 죄악을 향수하듯 향수하기 때문에, 극복해야할 어떠한 유혹들도 갖지 않으며, 악을 향해 끌어내리는 대립적 힘이 여기에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도덕적이다.
이 아름다운 영혼의 고유한 특성이 도덕적 우아함이다. 직관적 우아함은 곧 영혼의 자유가 단순한 질료들의 어두운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에게 안겨준 승리의 저 자명성에 다름 아니다. -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승리는 안겨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반면 저 더 깊고 더 무거운 영혼의 고유한 특성이 품위이다. - 즉, 쓰디쓴 자기 극복을 넘어서 유혹과 지극한 세속성의 모든 어두움을 넘어서 영혼에 자아와 영혼의 자유를 구해준 그 영혼에는 약함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들의 가장 강함에 대해 승리를 거둔 품위가 귀속되는 것이다.
내가 스케치 해보려 시도했던 이 두 에너지의 대립과 투쟁은 인간 영혼과 단순한 자연의 힘 사이의 거대한 싸움의 미적 형식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그 싸움의 정도와 적절함, 승리와 타협, 회피와 첨예화들이 인간의 역사에 그 색채와 가치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 "우아와 품위"에 대하여
"우아와 품위"는 F. Schiller가 1793년에 쓴 "우아와 품위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미적 범주로서의 '우아와 품위'는 쉴러를 비롯한 Lore Shaftesburz, Mendelssohn 등 18세기의 여러 사상가들의 주요 분석의 대상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쉴러는 인간행위의 아름다움을 자연적 천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건축술적(architechtonic) 아름다움과 인간의 의지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이성적 아름다움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감성적, 본능적 욕구와 이성적 의지가 조화된 상태를 이상적 인간의 전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인간의 이 양 충동을 통일시켜주는 원리로 이해됩니다.) 그에게 있어 '우아'는 인간 행위를 추동하는 자연적, 감성적 욕구와 인간의 이성적 의지가 완벽히 조화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행위를 특징지우는 범주입니다. 우아한 영혼 혹은 '아름다운 영혼'이 그의 감정과 욕구와 조화롭게 행위하는 것이라면 '품위'는 우아함을 보충해주는 덕목으로,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드러나는 행위의 특성을 지칭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상적 세계에서의 인간이라면 우아함만을 필요로 하겠지만, 현실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우아함 뿐 아니라 품위를 통해서 행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쉴러는 우아함과 품위를 이상적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 할 두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전 : Encyclopedia of Aesthetics ,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vol. 4)
*위에서 언급된 화가 미켈란젤로와 바로크의 대표적 예술가 베르니니와 Konstantin Meunier의 작품 사진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글과 비교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0.jpg)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1.jpg)
![](http://ncolumn1.daum.net/template/entryroot/migration2/aesthetics/img/000018_0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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