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광기와 권태 : Total Eclipse

김남시 1999. 10. 17. 00:34
랭보, 베를렌느, 꼬르비에르, 로트렉, 로트레아몽 등에 이르러 보헤미안은 사회에서 쫒겨난 방랑자들의 집단이 되었으며, 비도덕화의 무질서 가운데서 비참하게 생존하는 한 계급으로, 부르조아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서구문명에 결별을 고한 絶望者들의 한 집단으로 되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사회에 쓸모가 있을 법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삶에 영속성과 계속성을 부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분격하여, 또한 그들은 남들과 공통되어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성질에서 말살시켜 버리려는 듯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채찍질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불행하다는 의식 뿐만 아니라 또한 남들의 행복이란 것이 비속하고 천박하다는 감정이다. 이전 세대의 보헤미안의 생활은 적어도 색채가 있었으며, 그들은 다채롭고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 자기들의 비참함을 참았다. 그러나 새로운 보헤미안은 숨막힐 듯이 곰팡내 나는 답답한 권태의 중압 밑에서 산다. (하우저,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

가끔씩은 술을 진탕 마시거나, 혹은 날 매혹케 하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나의 광기를 , 나의 욕망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난 광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난, 나의 본연은 언제나 늘 내 속에 얌전히 잠재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솟구치듯 분출하여 자신의 나신을 뽐내는 오랜 기다림과 같다.
늘, 졸졸 새어나오는 것보다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내 주위를 뒤덮을 나의 그 '무엇'에 대한 기대. 언제나 감춰져 있는 자는 그 '단 한 번의 탈출'을 꿈꾼다. 날, 난, 그 순간에 확인하며 삶의 섬광을 찾는다. 어쩌면 일상의 침묵은 그 순간의 찬란함을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되돌아 올 곳이 있는, 뒤 돌아서서 표정을 다듬을 수 있는', '쓰러져 잠들 수 있는 혹은 그 폭발의 후유증을 피해 잠시 은둔할 수 있는 피신지가 마련되어 있는 광기'엔 어딘지 모를 병약함과 주저의 기색이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온다. 나의 주정이 그렇고 나의 사랑 고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마치 안전장치를 잠궈놓은 권총과 같아서, 아무리 총구를 이리저리 들이대며 호기를 부려도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 모든 호기가 '병적 모방'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다. 늘 되돌아 갈 곳이 마련되어 있는 '분출'엔 따라서 그 겉모습만큼의 흥분도, 그 출발직전의 긴장도 실려있지 못하다. 너무 많이 불어 늘어나 버린 고무풍선 같은 권태마저 느낀다.

건강한 광기.

그렇다. 오히려 '건강한 광기'는 되돌아 올곳 없는 그래서 끝간데까지 달려가 어떻게든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 '절망의 광기'에 있다. '절망과 욕망의 끝에서 비로소 쏟아져 내리는 그 광기엔 따라서 눈치보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 돌아갈 자리를 위해 슬슬 꼬릴 감추는 비루함이 없다.

를 보고 처음 받은 인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베를렌의 '퇴폐적 광기'에 대한 랭보의 순수한 광기. 베를렌의 병약한 욕망에 대한 랭보의 치열한 그것. 영화 속에서 두 시인은 누가 뭐랄 것 없이 함께 어울려 다니며, 시대를, 자기 자신을 견뎌내려고 한다. 끔찍한 삶의 권태와 부르조아들의 속물주의에 염증을 느낀 그들은 술과 詩로써 세상을, 자기자신을 저주하는 광기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다른 인간들의 모습에 혐오를 일으킨 것 만이 그들의 터져나오는 광기의 원인은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고결한 자신과, 그러한 나를 담아 둘 수 없을 만큼 혼탁한 세상'의 이분법은 기껏해야 '위선적인 구도자'나 '심약한 은둔자'만 양성할 뿐이다. 우리가 혐오스러우리 만치 끔찍한 세상의 속물성과 권태를 못 견뎌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혐오의 대상이기도 한다는데 에 있다. 온 몸을 옥죄어 누르는 듯한, 갑갑함의 감정은 그것을 혐오하는 나 자신에게서 동일한 혐오의 혐의를 발견함으로써 나타나는 '자기혐오'에서 나온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쉽사리 그 세상의 즉물성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 게으름, 용기없음까지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삶은 동시에 살아감을 포함하기에, 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쯤되면 '고결한 나와 혼탁한 세상'의 구도는, '날 포함한 세상의 치졸함과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날 혐오하는 나'의 좀 더 복합한 구도로 바뀌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혐오스러운 날 어쩔수 없이 계속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지긋 지긋해 죽겠다. 이것은 묘지다. 난 구더기들에게로 간다.
공포 중의 공포다!... 이 독, 이 저주받은 입맞춤!
나의 연약함, 세상의 잔혹함! {지옥에서의 한철} 중 민음사) 랭보


이 '지긋지긋함'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혐오하고 그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기획자체에 까지 씌워진 '위선의 혐의'이다. 종교적 위선을 폭로하는 '이성의 광원'이 또 하나의 속물적 속박이며, 부르조아적 즉물성을 비난하는 '구원의 외침'이 모습을 바꾼 위선의 음성이었다면, 이 삶을,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더더욱 암담하게만 보인다. 벗어도 벗어도 벗겨지지 않는 가면, 아니, 내 얼굴이 온통 그 가면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이러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끝'에서 시인은, 자신을, 시대를 견뎌낼수 없는 자신을 광기로 표출하게 된다. 억압적인 지상적 삶의 구조에서 오는 절망, 그 절망을 버텅겨 낼만큼 영악하지도, 약삭빠르지도 못하는 시인의 예민한 감성은 급기야 퇴행으로, 파행적으로,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점잖은 식탁에서 난장판을 벌이며, 부르조아의 위선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탕'의 끝은 언제나 참담할 뿐이다.

분개, 방탕, 광기 - 이것들의 모든 충동과 참담한 결과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성의 囚人이 되고 싶지도 않다. {지옥에서의 한철} 중 (민음사) 랭보


참담한 방황의 끝을 맛보면서도, 이성적인, 정상적인 삶의 질서에 복종할 수도 없는, 서늘한 잉여적 고통, 그로부터 악화되는 광기.

역사적으로 19세기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혁명과 반혁명, 전제와 공화제의 우여곡절 속에서 단 몇십여년에 근 몇세기의 역사적 체험을 하였다. 그것은 단지 수십년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의 부침이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혁명과 해방에 대한 낭만적 이상과 그 이상이 낳은 환멸사이의 고통스런 체험이었다. 민중은 위대하지만 또 무질서하기도 했다. 혁명은 아름답지만 파괴적이다. 바리케이트를 지키는 민중들은 혁명적 영웅이었지만 '냄새나는' 영웅 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천하기 짝이 없었고 주고받는 말도 어리석었고 땀이 내밴 이마에는 바보같은 만족감이 서려있었다.' {감정교육} 플로베르

이제 막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시할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한 부르조아들의 현실성은 혁명의 성과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환멸까지도 끌어안고 있다. 여기에 19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의 자기분열의 원천이 있었다. 그들은 혁명의 성과를 환영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모순된 감정을 겪어야 했다. 귀족적 본능과 민중적 의식 사이의 모순은 찬란한 혁명의 이상과 구차한 삶 사이의 분열로 드러나는 것이다.

베를렌은 아릅답고 돈 많은, 자신에게 섹스를 제공해주는, 한 부르조아의 딸과 결혼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비록 자신이 아내 집안의 재력에 의해 연명하고 있지만, 자신은 시인으로써 그보다 더 중요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위한다. 그래서, 그는 분열되어 있다. 스스로가 혐오하고 있던 부르조아적 질서에 의해 '연명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조아적 토대에 반부르조아적 정신. 그러나,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그 질서는 그로 하여금 그 질서에 대한 '완전한 절망'에도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아내를, 그 아내로서 대변되는 부르조아적 질서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광기는 언제나 '되돌아 올 곳을 남겨놓은' 그것에 불과하다. 영화 속에서 베를렌이 늘 탈출과 회귀를 반복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존재조건 때문이다. 그는 랭보와의 시적 생활로의 탈출을 기획하다가 어느 순간엔 다시, 자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있곤 한다. 아내와 가정과 아이를 탈피한 순간 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갖춘다.
이러한, 분열된 자아는 시인 자신에게도 또 하나의 자기혐오를 부가한다. 베를렌의 광기에서 보이는 '병적 징후'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탈출했는가 싶으면, 다시 자신을 불러들이는, 그 '끈질긴 삶의 굴레'에 베를렌은 폭력으로, 병적 투사로서 맞서려고 하나, 그 귀결은 그 어느 쪽 삶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음울한 패배일 뿐이다. 아내에 대한 구타, 아내의 집안에 대한 의도적 경멸 등은 그의 분열된 자아가 드러낸 부조화의 일면인 것이다.
자기존재의 분열적 토대를 인간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난 내가 혐오하던, 내가 저주하던 바로 그 질서에 의해 연명하고, 때로는 그 질서에 매혹당하기 까지 한다. 혐오스런 자신과 혐오의 주체간의 분열, 혐오스런 세상과 자신과의 분열, 나아가 분열된 자신에 대한 절망엔 두갈래 길만이 남아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상상적으로나마 그 세상으로부터 초월시키는 것이다. 앞의 길이 세상을 긍정, 수용하는 것이라면, 세상으로부터의 상상적 초월은 세계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거두는 것이다. 그렇게 우린 평안을 얻는다. 베를렌은 이 길을 택했다. 그는 모든 분열된 것을 통일시키는 저 거대한 종교의 품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랭보와 종교적 삶을 선택한 베를렌. 이상이 환멸과 자기혐오로 쇠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시인의 모습은 자기분열의 새로운 국면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당혹케 한다. 스스로 부정하려던 토대에 의해 연명하고 있는, 이제는 그 연명에 대한 어떠한 고집스러운 변명의 의지조차 포기한 우리에게 삶은 지긋지긋한 권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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