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기생수'

김남시 1999. 9. 18. 23:54
기생수와 인간의 공생

어디선가 날아온 테니스 공 만한 포자에서 한 생물이 기어나와 자고있는 사람들의 귀나 코를 통해 인간 몸 속에 침투한다. 그들은 뇌를 점령하여 인간을 숙주로 삼는걸 목표로 하는 맹목적 생명체이다. 기생수의 숙주가 된 인간은 여느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때때로 그 육체(생각하는 근육!)를 날카로운 거대한 칼날이나 이빨 등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뇌를 점령당한 숙주가 완전히 기생수의 희생물이 되어버리는데 반해, 뇌까지 도달하지 못해 오른팔에서 성숙해버린 오른쪽이나 턱에 기생하게 된(우다 아저씨) 기생수는 그 육체의 주인과 몸을 공유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로부터, 인간과 기생수의 기묘한 공생이 시작된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한 몸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뇌를 점령한 기생수들이 인간을 먹고사는 것에 반해, 신체에 기생한 기생수들은 숙주가 먹는 음식물에서 양분을 섭취해 살아가는 것도 그 타협의 한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통해 인간 몸에 기생하고 있는 기생수와 그 몸의 주인인 인간들이 서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생물적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던 오른쪽이는 신이치를 통해 인간 종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며, 신이치 역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생수를 절멸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이 인간 종 특유의 오만함이 아닌가 회의하게 된다.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미 지금도 다른 생물들을 충분히 죽이며 파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흉내내기, 닮아가기로서의 미메시스

자신과 다른 무엇인가에 동화되거나 그를 모방하려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오래된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 곤충이나 몇 몇 식물들은 자신의 몸 색깔과 형태를 주위 환경과 유사하게 만듦으로써 (보호색과 의태) 자신을 보호한다. 쥐며느리나 다른 동물들은 자신보다 힘이 센 다른 동물들의 습격을 받으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죽어있는 체' 한다. 곧, 죽은 것들을 흉내냄으로써 산 자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충격을 받거나 매우 놀랐을 때 몸이 경직되거나 실신하는 것은 이렇게 '죽은 체'하던 예전 습성의 흔적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적 자연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선사 시대의 인간들 역시 이 방법을 택했다. 춤과 음악, 회화 등 오늘날 예술의 원형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고대의 축제에서 사람들은 리드미컬한 몸 동작과 노래 등을 통해 동물의 울음과 행동을 모방한다. 자연의 파괴적 힘들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모방하고 양식화하여 그것과 일체화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생각하는 육체 곧,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기생수는 원하는 대로 그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싸울 때 날카로운 칼날이나 총알을 막는 방패 등으로 변하거나, 한번 본 다른 사람의 얼굴 모양으로 변하기도 한다. 오른쪽이 역시 평소 때는 신이치의 오른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싸움을 벌이거나 다른 일들을 할 때면 그에 맞는 모습으로 변한다.

모습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흉내 낸다는 것이다. 흉내낸다는 것은 자신이 흉내내고 있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놀이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 심지어는 로봇이나 기차, 비행기를 흉내내며 논다. 그가 '용가리'가 된 순간, (최소한 아이의 머리 속에서) 용가리와 자신을 구분하던 경계는 사라져 버린다. 아이는 엄마의 호출에도 용가리의 울음으로 대답한다. '허∼흥'

신이치의 오른손을 흉내내며 놀고있는 오른쪽이와 원래의 오른쪽이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오른쪽이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신이치의 꿈속에 등장한 해골같은 모습? 아니면 신이치가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는 귀여운 해면류같은 모습? 아니면 신이치의 오른손 모습? 이쯤되면 우린 누가 누구를 흉내내고 있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게 된다. 혹시 그의 오른손이 가끔씩 오른쪽이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만화의 라스트 씬은 이런 점에서 읽혀질 수 있다. 기생수들과의 처절하고 긴 싸움이 마무리된 후 오른쪽이는 이제 영원히 신이치의 '오른손'으로 되돌아가길 아니, 영원히 오른손을 '흉내내고 있기로' 한다. 그것은 신이치에게 있어 이제부터 오른쪽이의 도움 없이 세상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른 사람들의 오른손과 다를 바 없는 그 오른손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여자 친구를 괴롭히는 살인마를 쓰러뜨리고, 건물에서 떨어지려하는 여자 친구를 붙잡아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했다. 허엇!- 살인마의 칼을 막으면서, 퍼∼억!-그의 면상을 가격한 후, 흐흡!-막 넘어지려는 여자 친구의 손을 붙잡으려는 찰나, 헉!, 이런 ! 일말의 차이로 여자 친구는 건물 아래로 떨어저내린다.

그러나,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신이치의 오른손이 '마치 오른쪽이처럼' 건물에서 떨어지는 여자친구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오른손을 흉내내던 오른쪽이와 오른쪽이를 흉내내는 오른손, 이 순간 비로소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공유하고 하나가 된다.


기생수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속에 섞여 살아가기를 택함으로써 '기생수 사건'은 일단락 된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잡아먹지 않고, 인간의 모습을 한 기생수와 인간을 구분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아니 그러고 보니 이제 그들을 해치울 요량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들을 분간해 낼 필요도 없다. 지구를 독점하려는 인간들의 오만함에서가 아니라면, 어차피 지구는 여러 생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이젠 인간들이 그들을 닮아가야 할 차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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