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강원도의 힘

김남시 1999. 10. 7. 00:16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필연적 법칙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일까? 지극한 권태에서 내뱉은 한 두 마디들, 어쩔 수 없이 질척거려야 했던 삶의 전행들이 모두 내 내부의 필연적 근거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면? 일상의 끔찍함은 그것이 어떤 필연성도 갖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든 필연성에 의해 좌우되는 자유의 부재에서 오는 것일까? 만일 나의 삶이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계획과 원리에 의해 좌 악 진행되고 있다면 난 덜 권태로울까? 아니면, 나의 권태는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이 내 앞에 마련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일까?

18세기 부르조아들의 권태는 확실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자본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 속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권태에 몸을 떨었다. 이렇게 보면, 2000년을 2년 앞둔, 대한민국의 우리에게 '권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다르게도 할 수 있지만, 어떻든, 나의 삶은 이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다 걸 알고 있는데서 오는 이 끔찍한 옥죄임. 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강원도'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일상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장미빛 사랑을 꿈꾸는 소녀의 설레임이 섣부른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들은 '여행'이라는 낭만적 기대가 복잡한 기차 안에서의 피로와 서투른 막막함, 그렇고 그런 풍경과 취기 등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는 걸 안다. '강원도'라는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작은 기대들을 팔벌려 맞아들이는 닳고 닳은 창녀와 같다. 우린 '여행'이라는 낭만적 추상이 주는 설레임에 기대 보지만, 정작 내 앞에 펼쳐진 '그 곳'은 '이 곳'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또한 그들은) 짜증스런 피로만을 남기는 여행을, 불편한 찝찝함으로 끝날 사랑을, 불쾌한 속쓰림으로 종결될 술을 마신다. 어쩌면 이것이 또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기... 이쯤되면, 스피노자적 범신론은 지긋지긋한 삶의 중층구조로 바뀐다.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이것이 우리 삶들이 견디고 있는 뿌리 깊은 형이상학이다.

언젠가 난 종말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난 이 끔찍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종말론의 종말에 대해 말했다. 현재는 언제나 괴로운 것, 사람들은 고통의 종결과 현재의 종결을 동일시했다. 15세기 모어의 유토피아와 유대인들의 최후의 심판, 그리고 맑스주의에서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은 현재를 끝장냄으로써 괴로움과 고통을 종결시키려 했다. 그렇다. 끔찍한 현재를 탈출하는 길은 현재가 끝장나거나 내가 끝장나는 두 가지 길밖엔 없다. 그러나, 현재를 탈출하려는 '모든 자유에의 시도'가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범신론'의 그물에 걸려 구차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볼 때, 탈출에의 희망은 시덥잖은 치기로 여겨져 버린다. 그렇담, 날 끝장내? 그러나, 우린 그것 역시, 탈출의 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지숙은 울고, 상권은 술을 마실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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