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추상충동과 이집트 미술

김남시 1999. 9. 14. 01:35
Worringer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에 대한 자연주의적 모방에서부터가 아니라 '기하학적 추상'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원시인류를 위협하던 세계에 대해 인간은 처음부터 친화적으로 다가갈수 없었다. 오히려 인류는 우연적이고 상대적이며 언제 변화할지 모르는 외계대상들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추상적 형태로 변형시킴으로써 심적인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학적 욕구를 그는 '추상충동'이라고 부른다. 추상충동에 의해 재현된 대상들은 그 '공간감'이 제거되며 평면화되는데, 이는 3차원적 깊이와 연장이 한 대상의 '질료적 개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흐리게 함으로써' 대상의 우연성과 가변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물들의 깊이는 평면화되고 3차원적 공간은 2차원적 평면으로 변형된다.

이집트 미술에서 보여지는 기묘한 인체 형태는 이러한 추상 충동의 전형적 소산이다. 3차원적 인체는 2차원으로 평면화되어 인물의 상반신은 정면을 향하고 하반신은 측면을 그리고 얼굴은 옆으로 돌리고 있는 인물상이 그려지게 된다. 이를통해 이집트인들은 공간연장을 지닌 3차원적 대상을 한 시점에서 바라보았을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왜곡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인간은 두팔과 두 다리를 지닌 온전한 형태로 그려져야 했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 피카소의 인물상은 이집트 미술의 정신과 상통하고 있다. 그에게도 인물은 시점을 달리해서 보지 않으면 안될 3차원적 신체가 평면에 집약되어 있다.)

외계에 대한 최초의 불안이 극복되어 가면서, 인류는 자연과 세계에 대해 점차 친화적으로 접근해간다. 자연물의 형태나 유기적 균형등은 이때에야 비로소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주 형태로 굳어져있던 조각상들이 점차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변화해 가는 것은 인류가 외계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점차 자연의 유기적 형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대상을 절대화시키려는 충동. 수메르 법전을 만들어낸 수메르 인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그들의 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신의 '변덕'에 의해 만들어졌다. 신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세계와 인간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또 언제 기분이 나빠지면 세상을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참을수 없는 세계의 우연성 속에서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인위적 규칙을 세우고자 했다.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세상과 삶의 우연성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인류최초의 '법률'은 세계의 자의성과 우연성으로부터 삶에 어떤 '안정적 규칙'을 부여하려는 충동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읽을수 있는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  (0) 1999.10.26
광기와 권태 : Total Eclipse  (0) 1999.10.17
강원도의 힘  (0) 1999.10.07
시간과 형상  (0) 1999.09.29
'기생수'  (0) 1999.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