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얼굴의 미학적 의미

김남시 2000. 2. 12. 14:03
이번 호에는 Georg Simmel의 짤막한 글, 얼굴의 미학적 의미 (Die asthetische Bedeutung des Gesichts : 1901년)를 번역하여 실었습니다.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에밀 뒤르켕, 막스 베버와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이며, 맑스주의와 비판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남긴 사회학자입니다. 그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글을 남겼으며 그 중 문화 및 문명 분석은 오늘날의 '문화학'의 모델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엔 그의 책 {돈의 철학}이 번역되어 있지요. 본 글은 Switzerland 사회학회 홈페이지 (http://socio.ch/sim/index_sim.htm)에 실린 짐멜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잘못된 번역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굴의 미학적 의미>

인간의 얼굴이 조형 예술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왔던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 얼굴 속에서 영혼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감성적으로 지각 가능한 어떤 특성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얼굴이 예술 작품에 대해 가지는 직접적인 어떤 미적 특질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 요소들을 자신 속에서 통일적으로 종합해내는' 데에 인간 정신의 독특한 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은 공간과 시간 속에 그저 늘어서 있는 사물들을 하나의 형상, 하나의 개념, 한 문장의 통일 속으로 이끌어온다. 그 요소들의 상호관계가 밀접하면 밀접할수록, 그들 사이의 생동감 있는 상호 작용이 그들 서로간의 의존성 속에서 그들의 분리를 넘어설수록 (통일된) 전체는 더욱 정신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들 간의 내적 연관과 더불어 생명활동의 통일성 속에서 부분들 간의 밀접함을 지닌 유기체야말로 정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인간 신체 중에서 얼굴은 이러한 내적 통일성을 보여주는 가장 외적인 척도를 갖는다. 그 첫째 징후이자 증거는, 입술을 삐죽거리거나 코를 실룩거리는 것, 혹은 눈을 이래저래 깜빡이거나 이마의 주름살을 만드는 등에서처럼 단지 얼굴의 한 요소가 변하기만 해도 곧바로 얼굴의 전 성격과 표현이 (그에따라) 양식화된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아주 작은 한 부분이 흉하게 됨으로써 쉽게 그 (얼굴) 전체가 미적으로 추해지게 되는 현상은 인간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얼굴이) 지니고 있는 통일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얼굴은 각 부분들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뿌리로 서로 밀접히 관계 맺고 있기 때문에, 얼굴의 각 부분들은 (자신이 손상됨으로서) 다른 모든 부분들을 손상시킬 수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신체 부분들 중에서 가장 큰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손도 얼굴에는 비교되지 않는다. 손은 손가락들 사이의 놀랄만한 연관성과 상호작용에도 불구하고, 하나 하나의 손가락들이 서로 큰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반대쪽 손을 지시하고 있는 손(Hande)은 그 때문에 다른 손과 함께 있어야만 비로소 손의 이념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얼굴의 통일성은 머리가 목 위에 놓여있음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그를통해 얼굴엔 몸통에 상응하는 정도의 비중이 부여되고 몸통은 그에 따라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되는데, 이로인해 몸통을 가리면 그는 곧 목까지 가린 것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통일성은 언제나 그 자신 속에서 다양성과 관계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 내의 그 어떤 형상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얼굴에서만큼, 형태와 모습에 있어서 저 수많은 다양성을 감성의 무조건적 통일성 속에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들 사이의 이상적 상호 작용이라 일컫어지는 것, 곧, 개인들에 의해 자유롭게 만들어지지만 모든 개인들을 넘어 있으며 그러나, 또한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는 저 통일성 속에서 개인들의 개별화가 통일되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이러한 근본적인 삶의 모습의 가장 완전한 실제성을 우린 인간의 얼굴 속에서 발견한다. 개별자들을 넘어서지만 그 개별자들을 건너뛰어 버리지는 않으며, 개별자들의 단순한 총합 이상이지만 여전히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내용을 우리가 한 사회의 정신으로 제시하듯, 얼굴 인상의 배후에 숨어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인상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영혼은 바로 그 고유한 인상들의 상호작용이자 서로의 서로에 대한 가리킴에 다름아닌 것이다.

순전히 형식적으로 보면, 얼굴은 너무 다양하고 변화 무쌍한 구성 요소와 형태, 색깔등으로 인해 매우 모호한 것이어서 만일 이 다양성이 동시에 저 완전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미적으로 선호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미적으로 효과적이고 즐길만하게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얼굴 요소들 사이의 공간적 연관이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집중되는 미학적 효과를 얻기 위해 모든 개별적인 형상들은 그 부분들을 최대한 응집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사지를 옆으로 뻗거나 벌리는 것이 추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현상의 중심과의 결합을 곧, 우리 존재의 반경에 대한 정신의 시각적 지배를 중단시키거나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사지를) 넓게 뻗고 있는, 그래서 각 부분들이 쉽게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바로크 시대 형상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고유하게 인간적인 것 즉, 모든 개별체들을 중심적인 자아의 힘 아래로 무조건적으로 복속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얼굴의 구조는 그러한 원심성, 그럼으로써 (대상으로부터) 그 정신성을 제거하는 것(Entgeistigung)을 아예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입을 크게 벌리거나 눈을 양쪽으로 잡아늘일 때처럼 (그러한 원심성)이 일어날 때 얼굴은 특히 미적이지 못하게 되며, 이 두 운동(입을 벌리고 눈을 잡아늘이는 등)은 "정신성이 제거된 상태"이자 영혼의 마비,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정신적 지배가 일시적으로 상실된 것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

특히 얼굴이 다른 사지들에 비해 무게(Schwere)의 영향을 덜 보여준다는 사실이 얼굴이 지니는 정신성의 인상을 더 강화시킨다. 인간의 신체는 그 위에서 정신적-생리적 충동들이 물리적 무게와 투쟁하는 무대이다. 이 투쟁을 이끌고 매 순간 그를 새롭게 결정하는 방식들이 개별자와 유형들이 표현되는 양식(Stil)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이다. 얼굴 안에서는 이런 육체적 무게들이 (다른 신체 부분들에 비해) 그리 크게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또한 얼굴은 강한 정신성의 인상을 지닌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자고 있는 사람의 감겨있는 눈과 가슴 위로 떨구어져있는 머리, 축 늘어져 있는 입술들은 그에 따르는 근육 조직의 무게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저하된 정신적 삶의 징후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의 담지자만은 아닌데, 이는 마치 정신적 내용들이 그 내용들과는 전혀 무관한 그릇 속에 정리되어 담겨져 있는 책과 유사하다. 인간의 정신성은 동시에 개체성(Pers nlichkeit)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얼굴을 정신의 상징으로서 뿐만 아니라, 혼동될 수 없는 개체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특히 신체의 은폐를 특징으로하는 기독교 이래 특히 옹호되어 왔다. 얼굴은, 나체 상태에서 어느 정도 분명히 개체성을 드러내는 육체의 상속인이었다. 그러나, (개체성을 드러내 주는)데 있어서 육체의 능력은 얼굴의 능력만큼은 못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얼굴과 마찬가지로 육체들은 그를 예리하게 관찰하는 눈에 의해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얼굴과는 달리 그 차이들을 분명히 명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정신적 개체성은 특정한 혼동될 수 없는 육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린 언제나 (그 육체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육체는 하나의 개체성에 관해 말해주지 않으며, 얼굴만이 그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육체는 그 움직임을 통해 영혼의 모습을 아마도 얼굴만큼이나 훌륭하게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만으로는 딱딱한, 겉으로 드러난 형태로 굳어버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아함이라고 부르는, 흐르는 듯한 아름다움은 손의 움직임과, 상체의 기울임, 경쾌한 걸음걸이에서 언제든지 새롭게 생겨나긴 하지만 그 속엔 지속되는 개인적인 움직임이 결정화되어 남아있지 않다. 이에 반해, 얼굴 속에선 바로 그 개인에게 전형적인 자극들이 새겨진다. 증오나 분노, 상냥한 미소나 불안하게 상대를 탐색하는 등 셀 수 없는 수많은 표정들 - 얼굴에 머물러 있는 표정들, 그 표현들은 곧 머물러 있는 성격의 표현으로 (얼굴의) 운동 속에 침전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특유한 구성력에 의해서 얼굴은 그것이 조망될 수 있는 한, 동시에 내적 개체성이 드러나는 지리학적 장소이기도 하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그 얼굴을 통해서만 대변하려 해 온 기독교의 은폐 경향은 바로 이 개체성의 의식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 온 것이다.

개체성을 미적으로 묘사하는 이러한 형상적 수단들 외에 얼굴은 그와는 대비되는 원리를 갖는 또 다른 수단을 갖는다. 그것은 얼굴이 서로 동일한 반쪽으로(곧,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데, 이를통해 (얼굴엔) 흥분되고 격앙된, 완전히 개인적인 형상을 완화시켜주는 내적 고요함과 조화로움의 계기가 존재하게 된다. 얼굴의 반쪽은 다른 반쪽 - 그 반쪽들은 다양한 측면 모습과 빛에 의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 에게 있어 하나의 준비 태세이자 동시에 하나의 사라짐이다. 개개인의 결코 같을 수 없는 표정들은 저 이원성의 무조건적 동일화 가능성 속에서 자신의 대립물과 동시에 조화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대칭(조화)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의 대칭 역시 그 자체로 반-개체적인 형태이다. 대칭 형상 속의 한 부분은 (그와 대칭되는) 다른 부분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 그를통해 대칭은 그 양 부분을 공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위의 원리를 지시한다. 합리주의는 (따라서) 모든 분야에 있어서 대칭적 형태를 추구하는 반면, 개체성(개별성)은 언제나 모든 규정적 원리들에서 벗어나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얼굴의 양 부분을 대칭으로 만든 조형물은 일반적이고 유형적인 양식, 곧 개체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양식에 의거하고 있는 것임에 반해, 얼굴의 각 부분들을 그 직접적인 모습 속에서 서로 다르게 - 측면도와 빛,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로 - 그린 그림은 처음부터 얼굴의 개체적(개별적)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얼굴은 대칭과 개별화라는 형상적 원리들을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시킨 미적 종합체이다. 다시말해, 얼굴은 전체로서의 개별화를 실현시키면서도 이를 그 부분들 사이의 연관을 지배하는 대칭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미적 서열을 부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형상적 관계이다.
스스로 변화하는 대상 혹은 이와 유사한 모든 대상들의 미적인 성격은, 얼마나 포괄적으로 그 부분들의 변화가 전체의 인상 변화를 초래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상적인 종류의 미적 대상, 즉, 미적으로 효과적인 대상은 (그 대상 내부의) 작은 요소들의 변화에 그 전체가 생동감 있게 반응하는 대상들이다. 이는 곧 그만큼 그 부분들 간의 상호 관련성이 섬세하고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모든 변형을 일으키는 그 대상의 내적 논리가 하나의 전제로부터 피할 수 없이 도출된 결론을 뒤따르듯 필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미적 탐구와 조형이, 사물들의 무관계성(Gleichgueltigkeit)을 - 그 무차별성은 단지 사물들의 실존방식을 이론적으로 고찰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인데 - 지양시킨다면 그리하여, 그 대상들을 구성하는 요소들 상호간의 무관계성이 완전히 지양되고,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다른 개별적인 것들의 전체성을 규정하는 운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물들은 무관계성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얼굴은 개별자 내의 최소한의 변화를 통해 최대한의 전체 인상의 변화를 산출해내는 과제를 가장 완벽하게 해결하고 있다. 사물의 형상적 요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는 모든 예술의 문제에 대해 얼굴만큼 숙명적인 것은 없는 듯 한데, 그것은 얼굴 속에서의 모든 표정의 규정성은 모든 다른 표정의 규정성 곧, 전체의 규정성과 연대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의 출발이자 결론은 바로 얼굴이 지니고 있는 놀랄만한 운동성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눈에 잘 띠이지 않는 작은 자리 이동 밖에는 할 수 없는 (얼굴이),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얼굴의 전 용모에 끼치는 영향을 통해, 동시에 잠재적인 인상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얼굴은 마치 저 거대한 운동들이 고요한 얼굴의 상태 속에 감추어져 있는, 혹은 그로부터 무수하게 발산될 수많은 운동들이 그를 향해있는, 펼쳐지지 않은 계기들과 같다.

이처럼 최소한의 운동을 통해 발생되는 거대한 운동 효과들의 정점은 눈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회화 예술에 있어서 눈은, 눈의 잠재적 운동성이 전체 인상과 갖는 연관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묘사된 개인의 눈빛이 그림 내의 공간 해석과 구획에 대해 갖는 의미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눈만큼이나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그를 훨씬 넘어서까지 뻗어 나가는 것은 없을 것이다 : 눈은 관통하고 도주하며, 공간을 순회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를 헤메 다니며 자신이 열망해 왔던 대상을 (배후에서) 붙잡고 그를 자신에게 끌어오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그림의 공간을 구획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시선의 방향과 강도, 시선의 전 형태를 결정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특별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영혼을 비추어내는 얼굴의 성과는 눈에서 그 최고도에 달하게 되는데, 동시에 눈은, 그 외관의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정신성에로의 회귀에 대해선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의미를 발산함으로써 그 가장 세련되고 순수한 형상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예감, 아니 담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곧, 순수한 시각성을 구현하거나 사물의 순수한 감각적 상(Bild)을 그려내려는 예술적 문제들 - 완전히 해결된 문제들 - 이 동시에, 영혼을 은폐하기도 드러내기도 하는 외관과 그 영혼 사이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문제들의 해결을 함축하고 있으리라는 예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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