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베트남 담배 밀매꾼

김남시 2004. 2. 23. 00:44
 

그들은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네보루 이상의 담배를 숨기고 있을 그들의 헐렁한 잠바 속 주머니가 바깥으로 너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어서도 안되고, 거슬러줄 잔돈이 잔뜩 들어있는 동전 주머니에서 지나치게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도 안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전철이나 기차역, 슈퍼마켓 앞에 상주하면서도, 그들은 마치 그곳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보행자 중 하나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밀수 담배를 사러 온 고객에게 돈을 받고 담배를 건네주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그들은 마치 아는 친구에게 담배를 건네주듯 자연스럽게 행동해야만 한다.


다른한편 그러나, 그들은 눈에 띄어야만 한다. 시가보다 40퍼센트 이상 싼 밀수 담배를 사려는 고객들의 눈에 띄이지 않으면 이들은 아무 것도 팔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를 사라고 외칠 수도, 밀수 담배를 판다는 간판을 내걸지도 못하는 이들, 경찰의 눈엔 평범한 보행자나 거주자로 보이면서 구매자에겐 담배 밀매자로 확인되어야 하는 이들의 교묘하고도 복잡한 생존전략은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인종적, 문화적 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베트남인들이다. 전후 서독이 터어키와 한국에서 광부와 간호사,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면, 동독은 사회주의 형제국 베트남과 구 소련의 인력을 수입하였다. 독일 통일과 함께 동독 정권이 붕괴하고 일자리를 잃게 된 베트남인들 중 아시아 음식점이나 꽃가게, 싸구려 의류 행상등으로 성공(?)한 이들을 제외하곤 나머지들은 거대한 담배밀매 조직의 일선 밀매꾼들이 되었다. (베를린에선 종종 베트남 담배밀매 마피아와 러시아, 폴란드 마피아 사이에서 밀매 영역을 둘러싼 살인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독일에서 시중보다 싼 가격의 밀수 담배를 사려는 사람들은 우선 기차나 지하철 역, 큰 슈퍼마켓 앞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베트남인들을 찾아야 한다. 빳빳하고 검은 머리칼과 작은 키를 한 베트남인들 중 허름하고 헐렁한 잠바와 청바지, 챙을 구겨 삐딱하게 눌러쓴 베이스 캡을 쓰고 하루 종일 일정한 장소를 배회하는 이들이 있다면 십중팔구 이들에게서 싼 담배를 구입할 수 있다. 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 담배를 달라고 말하면 마술사처럼 재빠르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몸 속 어디선가 담배를 끄집어내 건네주는 이들의 놀라운 기교를 감상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유럽인들은 베트남인과 중국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슈퍼 앞 벤치에 앉아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빨고있던 내게 담배를 달라고 했던 몇몇 독일인들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