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독일에 부는 동독열풍

김남시 2003. 9. 5. 17:58
요즘 독일에서는 DDR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ㆍ구동독)이 유행이다.

망치와 컴파스를 겹쳐놓은 모양의 동독 마크가 달린 가방, 티셔츠, 장신구 등이 얼마 전부터 거리에 등장하더니 지금은 공급이 딸릴 정도로 팔려 나가고 있다. 얼마 전 베를린 국립 갤러리에서 열린 ‘동독예술 회고전’은 4만여명의 방문객으로 호황을 이뤘다.

동독제 승용차 트라반 전시회 역시 많은 관객이 끓었다. 동독 기념품은 물론 동독산 오이피클, 초콜릿, 술 등 생필품과 일상용품까지 수요가 급증하자 발 빠른 기업가들은 통일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던 동독제 물건들을 다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급기야 방송국들도 경쟁적으로 동독 유행에 가세했다. 독일 최대의 방송그룹 RTL이 구 동독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쇼 프로그램을 방영한 후 다른 방송사들도 앞 다투어 ‘동독쇼’를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추가했다.

이 거대한 동독열풍의 신호탄은 올 봄 개봉해 수백만명의 관객을 기록한 영화 ‘굿바이 레닌’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사회주의 동독의 해체라는 역사적 격변을 동독의 한 젊은이와 초등학교 교사인 그 어머니의 가족사를 통해 보여준 이 영화는 독일인, 특히 서독 출신들에게 동독과 동독인들의 과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되었다.

서독인들은 일당독재, 실패한 계획경제, 국가경찰의 감시와 통제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로만 알려진 사회주의 국가 동독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을 하고, 삶의 계획을 세우며, 그들의 일상을 즐겼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의 직장, 학교의 동료가 된 구 동독인들이 과거에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노래를 즐겨 듣고, 무엇을 사먹고, 어떻게 주말을 보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독 열풍의 배후에는 그 무엇보다 구동독 출신 독일인들의 애처로운 자기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독일 통일 후 완전히 다른 사회체제의 규칙과 질서에 힘겹게 적응해야 했던 동독인들에게 몰락한 사회주의 국가 동독에서의 삶의 기억들은 되도록 감추고 숨겨야 할 구멍 난 양말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태어나 자라나고 성장했던 국가, 동독의 정당성이 역사적, 정치적으로 부정되면서 그곳에서의 그들의 삶과 일상 역시 함께 부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통일된 지 1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동독인들은 동독에서의 삶에도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사람들 사이의 애증과 일상의 행복이 있었노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독 열풍을 통해 표출되는 동독인들의 조심스러운 자기주장이 서로 다른 이념과 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동.서독인들 사이의 소통과 이해에 기여하게 될 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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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자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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