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학문과 지식

김남시 2002. 10. 3. 23:19

   오늘날의 베를린에서 불과 10여년전까지 번듯히 존속하였던 사회주의의 자취를 찾기란 예상보다 쉽지않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세계 정치적 지형의 급격한 변화는 불과 10여년 만에 바로 그 역사의 현장 베를린을 또한 급격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베를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관광 상품이 되어버린 옛 베를린 장벽의 조각들이나, 첵크 포인트 찰리에 모아놓은 동독 탈출기 등이  아닌, 살아있던 사회주의의 흔적을 찾는 일은 시간과 준비작업을 필요로 하는 쉽지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케 소멸의 위기로부터 벗어나 남아있는 ‚사회주의적’ 흔적들을 여기 저기서 발견하는 경험은 마치 숨겨진, 그것도 의도적으로  눈에 띄이지않게 감추어진 보물들을 찾아내는 탐구자의 그것처럼 흥미롭다. 물론, 그렇게 발견되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의 흔적들이 모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 중 하나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낡고 균열이 간 건물, offen Heizung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못한 지하철, 부족한 재원으로 인해 염가로 보수되었음을 보여주는 천박한 건축재료 들은 사회주의 국가 동독의 낙후되었던 생활상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옆의 사진은 아직도 석탄으로 난방을 하는 동베를린 지역의 집들이다. 창문 아래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석탄 난로의 연기가 빠져나오게 되어있다.  동베를린 지역에선 지금도 저런 석탄 난방 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들이 사는 골목 구석구석까지 뻗어있는 대중 교통 시설, 주거지역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넓은 풀밭과 놀이터, 수적으로 풍부한 유치원과 학교시설, 수영장, 체육관 등의 스포츠 시설 등은 저 사회주의 국가가 그들 인민들의 삶의 질을 위해 베풀었을 노력의 흔적을 느낄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사회주의의 자취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도시 곳 곳 건물들에 남겨놓은 그들의 이념적, 정치적  자취들이다.  

       Zoologischer Garten에서 100번 버스를 타고 Staatsoper앞에 내려 Unter den Linden을 가로 지르면  바로 훔볼트 대학 정문에 닿는다. 양쪽으로 두 명의 훔볼트 동상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통과해 헬렘홀즈 동상이 위치한 건물  앞 작은 호프를 지나 무겁고도 커다란 나무 문을 힘들게 열고 들어서면 훔볼트 대학 본관 복도가 펼쳐지는데,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왕자의 궁전이었던 건물답게 복도 중앙에 커다란 중앙 계단이 아래를 향해 장중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그 중앙계단 정면 한 가운데 박혀있는 글귀에 가 닿는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만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는 그 글귀는 칼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다.  이 명판은 물론 1810년 설립된 과거 베를린 대학 초기부터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맑스가 이곳 베를린 대학 법학과에 입학한 것이 1836년 이고, '포이에르바하에 대하여'라는 표제아래 쓴 위의 글이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이란 제목으로 엥겔스에 의해 처음 출판된 것이 1888년이었으니  최소한 그 이전에 이 명판이 만들어졌을리 없다. 당연히 이것은 사회주의 동독 정부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독일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베를린은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과 발전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특히 당시 베를린 대학으로 불리던 오늘날의 훔볼트 대학엔  피히테, 헤겔, 쉘링 등 맑스주의 이념의 철학적 바탕을 제공해주었던 독일 관념론의 대가들이 강의를 하고 있었고, 맑스와 엥겔스는 이곳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이었다.  1895년엔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의 레닌이 훔볼트 대학 건너편에 위치한 당시의 왕립 도서관 (지금의 법학과 건물)에서 혁명을  기획하기도 했다. 1946년 소련군의  통제아래  다시 개교 한 이후 동독 정부는 훔볼트 대학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사회주의적 전통"을 부각시키며 당시 베를린 시의 하나 뿐이었던 이 대학을 사회주의 건설의 학습장으로 만들려했다. 위 명판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 건물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저 테제, 학문의 실천적 개입을 강조하는 맑스의 테제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 동독은 대학에서의 학문 연구의 근본 지향을 강조하려 하였다.  학문이, 철학이 삶의 실천과 유리될 때, 그것이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만 자기 정립될 때 학문과 삶은 유기적 관계를 갖지 못한 채 고립된 갈길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권의 학문에 대한 이념적 개입은 현실적으로 많은 갈등과 반발을 야기시켰다.  학문의 방향을 이념적으로 규정하려 했던 소련 군부와 사회주의 정권의 시도는 이미 분단 전 부터  이 곳에 적을 두고 있었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동독 시절 발행된 훔볼트 대학 안내 책자는 이러한 갈등을 "나지쯤과 쇼비니즘적 정신을 척결하고 베를린 대학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이념을 전파하며,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교육에 있어서의 지배계급의 특권적 지위를  쇄신"하려는 노동계급과 그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간의 투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이 투쟁은 대학에 "반파시즘적인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결국은 "휴머니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이 책자는 전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의 대학 운영 및 방향에 대한 계속되는 이념적 개입과 간섭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학생과 교수들은  이후  1955년 당시 미국 점령지였던  젤렌도르프 지역에  미국 측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새로운 대학을 세우고 그를  '자유 대학'이라 칭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베를린에 여러 개의 대학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다.  동독발행 책자에서는 이 상황을 "대학을 무효화하려는 반동세력들의 시도가 실패하자 베를린의  미국 섹터에 반(Gegen) 대학이 설립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 있어서 지식과 학문은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그에 의거해 유지되는 사회주의적 현실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그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선 그리하여 모든 학문과 지식에 사회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부여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행해져왔다. 예를들어, 동독 시절 훔볼트 대학에선 '맑스 레닌주의' , '외국어', '체육학'의 세 과가 전체 학과와 분야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중에서도 '맑스 레닌주의' 과는 "학생들로 하여금 맑스 레닌주의적 세계관을 창조적으로 습득하고 이를 사회주의적 실천에로 적용시키게 하기위한" 가장 일선의 과제를 담당하고 있었다.  모든 학과의 학생들은 자신의 학과 학습과  자유청년동맹(FDJ) 활동, 그리고 맑스 레닌주의 학습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치-도덕적 소양을 함양"해야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학문의 실천적, 계급적 성격을 부각시키려는 동독 정부의 노력의 흔적은 훔볼트 대학과 한 블럭 거리로 떨어져 있는 국립도서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70미터 길이에 106미터 넓이에 달하는 이 거대한 고전적 바로크 양식의 복합 건물은 원래 1903년 황제 빌헬름 2세의 위탁으로, 당시 프로이센 국립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그리고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가 들어서도록 지어진 것이었다.  이후 국립 도서관으로 사용되게 된 이 건물 입구 호프에 가 보면, 지금도 담쟁이 덩쿨이 고풍스럽게 뒤덮인 건물 전면에서 장중한 바로크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앞마당 옆에 오른 쪽에 이 건물의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동상 하나가  서 있다.  arbeiter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이 낯선 동상은 그 규모나 분위기 면에서 원래 건물에 부속되어 있는 다른 인물상들과 비교해볼 때 사실상 조잡해 보이기까지도 하다.  그러나, 이 동상엔 무언가 특별한 것이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동상의 인물은 분명히, 어깨끈이 달린 전형적인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겉옷을 벗어 오른쪽 어깨에 걸친 이 노동자는  손에 작은  책을 한권 들고 사색에 잠겨있다.  자세히보면, 그의 손이 몸의 전체 비례에 비해 매우 크게 강조되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동하는  
손, 세계를 창조하는  노동자의  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동자 상이 건물 중앙문 위에 서 있는 철학자 상의 포즈를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토가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다면, 노동자는 자신의 작업복 외투를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둘 다 똑같이 왼손으로 책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그 책을 집어들고 있다.  이 동상이 왜 국립 도서관 건물 앞에 세워졌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이 동상은  사회주의 동독 시절 세워진 것이다.  동 베를린의 한 이름없는 '조각 노동자'는 이를통해 책을 통한 인류의 지적 유산이 토가를 입은 철학자나 지식인 만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민들의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철학자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