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베를린의 어제와 오늘

김남시 2002. 9. 24. 20:38
 

내게 이 글을 쓰게했던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학교 앞 에서 노상 열리던 헌책 노점에서 우연히 베를린 안내책자를 한 권 발견했다. 그 책은 1986년 베를린 시의 750주년 되던 해 '독일 민주주인 공화국 위원회'가 발행한 베를린 시 750주년 행사 기념책자 였다.  동독 정부서 발행된 다른 많은 책들처럼 lenin 이 책의 맨 앞장 엔 호네커의 사진과 함께, "이 축제가 사회주의와 평화를 더 강화시키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인사말이 실려있었다. 베를린을  "평화의 도시, 과학과 생산의 도시, 삶의 기쁨의 도시, 예술의 도시, 국제적 만남과 회의의 도시, 스포츠의 도시' 등의 제목으로 컬러 사진들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난 한 장의 감회로운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건 베를린 시 어디엔가 거대하게 서 있었던 레닌 동상을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 저 동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저 동상의 뒤편의 건물의 모습에 어딘가 낯익은 곳이 있다는걸 발견했다. 저 걸 어디서 보았을까.  


   그 장소를 기억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곳은 우리 집에서 시내 나가는 길에 지나는 거리였다. 난 그곳을 거의 매일 전차를 타고 지나다니며, 저 건물을 봤던 것이다.  
지붕위의 안테나와 건물 외관이 약간 변하기는 했어http://my.dreamwiz.com/southclo/lenin 2도, 바로 이 건물이저  사진 속의 건물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저 건물 앞에 불과 10여년 전 만 해도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었다! 


 즉시, 그 책에 실려있던 예전의 베를린 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곤 다음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총 45미터 높이의 레닌 동상을 중심으로 한 이 곳은 '레닌 광장' 이라 불리웠으며,  베를린 시 중심과 시 외곽이 만나는 접경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레닌 광장 앞을, 시내로 이어지는 몰 거리로 연결되는 긴 거리의  '레닌가' 가 지나가고 있었다. 1990년 이 레닌 광장은 '연합국 광장'으로, 레닌가는 아예 이름이 없어진채 그냥 몰 거리로 불리게 되었고, 거대한 레닌 동상은 몇차례의 폭파를 통해 철거되었다.  누구의 아이디어 였을까? 레닌 동상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엔 지금 그 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바위 덩어리들이 모양없이 둘러서 있다.


바위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면, 한  도시의  정체성은 그곳의 거리이름과 그곳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동상 등을 통해 그 도시가 자신의 과거 중 무엇을 기억하고 싶어하는가를 통해 만들어진다.  거대한 레닌 동상과 '레닌 광장'을 통해 사회주의 도시 베를린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면, 레닌 광장을 '연합국 광장'으로 , 레닌 동상을 한 무더기의 바위들로 바꾸어버린 현재의 도시 베를린은 그를통해 자신의 과거 중 한 부분을 망각하기를 택한 것이다. 


  통일 후 이런 식으로 바뀐 이름들은 베를린에 만도 여러 곳이었다.  훔볼트 대학이 있는 S/Bahn 역 프리드리히 거리와  방송탑이 있는 알렉산더 광장 역 가운데에 있는 맑스 엥겔스 광장 역은 '학커셔 시장' 역으로, 레닌가에 있는 지하철 역 '레닌가' 역은 '프랑크프르트 가'로 바뀌어졌고, 디미트로프 거리, 호치민 거리 등도 새 베를린 지도에선 자신의 이름을 빼았겨야 했다.  한편, 칼 맑스 로,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등은 통일 이후에도  그 장소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이 의도적인 선별 속에는 오늘날 베를린이, 아니 독일인들이 스스로를 규정짓고 싶어하는 정체성에의 요구가 숨어있을 터였다. 그것은 그들이 레닌, 호치민, 디미트로프를 망각하는 대신, 로자 룩셈부르크, 칼 막스, 칼 리프크네히트 등은 계속 기억함으로써 만들어질 정체성이었다.


  난 베를린의 이러한 변화를 좀 더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나는 사회주의 시절 베를린에서 일어난 변화를 찾아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 이후 잊혀지거나 삭제, 혹은 철거된 과거 사회주의 베를린의 흔적들을 찾는 것이 다.  이 작업을 통해 난 사회주의 베를린이 역사적 도시 베를린에 남겨놓고 싶어했던 기억이 무엇이었는가를 읽어보고자 하며, 그와 동시에 그 "기억에의 의지"가 남겨놓은 흔적을 통일된 현재의 베를린은 어떻게 수용하였는가를 알고자 한다. 

 

  통일 전의 독일처럼, 아니 그 보다 훨씬 적대적이고 이질적으로 대립한 채 살아가고 있는 남한과 북한은 각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함으로써 서로를 차별화시키기 위해 애써왔다. 그것은 동일한 언어와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생활방식, 도시건설, 세계관 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 남,북한 간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린 통일 후의 독일이 경험했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기억과 망각의 작업을 벌여야 할 것이다.   통일된 남한과 북한은, 자신들이 모아 온 역사의 사진첩에서 어떤 사진을 버리고, 어떤 사진을 통일된 대한민국의 사진첩에 끼워놓으려 할 것인가. 통일된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된 이 질문은 어쩌면  진작에 던져지고, 이야기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의 작업은 이를위한 첫단추가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