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체제와 이념을 넘어선 역사적 연속성

김남시 2003. 12. 9. 05:40
베를린 국립 도서관 연감ㆍ서지 코너에는 ‘독일 대학 학위논문 연감’이 있다. 매년 독일의 전 대학에서 배출된 분야별 학위 논문들의 저자와 제목을 수록한 이 연감은 1885년 당시 학술담당 장관의 명령으로 착수돼 1887년 1월 베를린에서 그 첫 권이 출간됐고, 이후 11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발행되고 있다. 그 동안 독일이 겪었던 역사적 격변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독일인들의 학문적 집착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위업이다.

연감 첫 권이 발행된 1887년의 독일은 1871년 수립된 입헌 독일 제국이었다. 연감 작업은 이후 1918년 혁명으로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과 1933년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도 계속되었다.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인한 자료유실과 대학간 연계두절로 인해 몇 해의 연감이 뒤늦게 발행된 적은 있었으나 중단되지는 않았다.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동독이 베를린과 이후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되던 이 연감의 편찬작업을 이어받았고 지금은 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이 계승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일은 입헌 군주제와 공화제, 나치 파시즘과 사회주의,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적 사회민주주의라는 서로 다른 이념의 사회ㆍ정치체제 하에서도 매년 전 대학 학위 논문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통계를 내 출판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온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냉전체제의 이념적,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동독이 발행한 연감들에는 동독 내의 대학뿐 아니라 적대국이었던 서독 대학들에서 나온 학위논문 목록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이념의 사회 체제들을 관통하는 연속성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891년 독일제국의 보수주의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도입된 사회보장제도 역시 그 중 하나다.

이후 몇 차례의 제도적 보완이 있었고 현재도 독일정계의 핵심 이슈로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독일은 1891년 이후 지금까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 원리에 입각해 사회적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제도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이 사회주의 동독 정권 시절 연금을 불입했던 동독인들에게까지 노후연금을 지불하는 것도 그 예다.

특정한 정치체제나 이념을 초월해 세대와 역사를 거쳐 추구되는 이러한 연속성들로부터 비로소 한 사회는 성숙할 수 있고, 발전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반면, 정권만 바뀌어도 삶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많은 일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사회는 장기적 발전 전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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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일 자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