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드레스덴 여행과 NPD

김남시 2004. 9. 26. 21:54

지난 주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드레스덴과 라이프찌히에 놀러갔다왔다. 가족이, 더 정확히 말해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왜 내가 "가족들을 데리고"라는 말을 강조했는지를. 독일에 온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린 어디 한번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다. 아니, 내가 살고 있는 베를린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열리는 저 탐나는 공연, 콘서트, 전시회 등 조차 마음의 여유를 갖고 방문해 보지 못했다. 바로 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콘서트나 공연들은 주로 저녁 시간 (8시 - 9시)에 열린다. 당연히, 이제 두살과 네살인 아이들을 데리고 가진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 중 누군가 한명은 집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고 재워야 한다. 하지만 그 누가 남편, 혹은 아내가 집에서 혼자 아이들과 씨름하는 동안, 베를린 필을, 키르히너를, 헬무트 뉴튼을 여유를 갖고 즐길수 있겠는가.

 

이번 주말의 여행은 그래서 근 3주동안의 물질적, 심적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린 아이 두명을 데리고 버스와 지하철, 기차를 타고 우리가 한번도 가본적 없는 낯선 도시의 숙소를 찾아간다는 것은, 마치 겨울 파카를 입고 한 여름 마라톤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그 육체적, 심리적 소진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감행할 바에야 우린 차라리 아이들을 집 앞 놀이터 모래판에서 놀게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차를 빌렸다. 금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생각보다 싼 가격에 (87 유로) 차를 빌려주는 렌트카 회사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려면 아동용 카시트가 있어야 했다. 그것도 두 개가. 교통 규칙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독일의 도로에서 한국에서처럼 아이를 그냥 무릅에 앉혀 차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렌트가 비용을 호가하는 비싼 벌금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만일의 경우 아이들의 안전역시 보장하지 못한다. 렌트카 회사에서3일간 두개의 카시트를 빌리는 가격이 50 유로가 넘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그래서, 차가없는 우리로서는 평소엔 전혀 쓸모가 없음에도 며칠동안 이베이를 뒤져 1유로씩에 카시트를 낙찰 받았다. 그리곤 자전거와 전철을 타고 베를린 시를 관통해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 정 반대쪽 동쪽에 살고있는 판매자 집에 가서 직접 카시트들을 받아 들고 오는데까지 1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드레스덴과 라이프찌히의 싼 호텔방 (에탑호텔!)을 예약하고 베를린에서 그곳까지의 도로 등을 알아보는데도 역시 약 1주일이 걸렸다.

 

금요일 아침 눈뜨자 마자 빌려온 메르세데스 벤츠 A 클래스 생각보다 엄청나게 작은 차다.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벤츠는 E 클래스다. - 에 꾸역꾸역 짐을 싣고는 베를린을 떴다.  빌린 차에 네비게이터 시스템에 없었더라면, 나 같은 길치는 분명 길을 잃고 졸려서 칭얼대는 아이와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밤새 헤매다녔을 것이다.

 

라이프찌히에선 바하가 살았다던 집과 그가 근무했던 교회, 그리고 바하 박물관에서 그가 쓰던 책상을 구경했다. 멘델스존과 바그너 박물관 등도 가보고 싶었지만, 유모차와 손을 잡고 걸리는 두 아이를 데리고 이 모두를 둘러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우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곤, 조금 일찍 출발해 드레스덴을 향했다.

 

중저가의 고급호텔임을 자부하는 드레스덴의 에탑호텔은 그러나, 한가지 결정적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도심 외곽지역에 자리잡고 특색을 갖는, 그래서 방값이 싼 드레스덴의 에탑 호텔은 정말로 드레스덴의 외곽, 그것도 거의 아무도 살지않는 허허벌판, 공장부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 심각했던 것은 그로인해 그 호텔의 주소가 아예 네비게이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라이프찌히에서 드레스덴 외곽 근처까지 도착한 나는 그 사실을 알고는 시력을 상실한 기분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곳을 찾아간단 말인가. 날은 어두어져 오고, 우리가 헤메고 다녔던 외곽도로 주변엔 NPD (독일 신나찌 정당)의 선거 표지판들만 잔뜩 걸려있었다. 세 번씩 전화를 걸어, 호텔 아저씨의 불친절한 안내에 힙입어(?), 주유소 안쪽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호텔을 찾아 도착한 시간은 거의 10시가 넘어서 였다.

 

어쨋든 드레스덴은 볼 것이 많은 도시였다. 최근 새로 개축한 프라우엔 교회와 즈빙거, 야트막한 산 자락에 늘어서 있는 옛 성들과 도심 한 가운데 남아있는 중세 골목, 파사지 등으로 드레스덴은 베를린이 줄수 없는 유럽 도시의 풍모를 즐길수 있게 했다.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중 문득 한가지 특이한 사실이 눈에 띄였다. 관광지 드레스덴 거리를 가득채운 관광객들 중 눈에 띄이는 외국인, 말하자면 유럽인들과 피부색깔, 머리빛 등을 통해 구별되는 외국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심심치않게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터어키 인들을 마주치는 베를린의 거리와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베를린에선 걸을 때마다 발에 걸릴 정도인터어키인은 커녕, 아프리카인 혹은 아시아인들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식사를 하러갔던 레스토랑과 호텔의 주인과 종업원들도 우리 가족 - 허름한 청바지와 베이스캡을 쓰고 한 손엔 네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은 나와, 두살 아이가 탄 낡은 유모차를 밀고 있던 아내 들을 바라보는 눈빛들에 무언가 편안하지 않는 저들만의 공모감이 배여있었다.

 

나중에 베를린에 돌아와 알게된 사실은, 우리가 드레스덴에 갔던 바로 그날이 그 곳 작센 지방의 선거 투표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이루어진 선거 결과 작센 지역에선 네오나찌 정당인 NPD Gruene와 자유주의 정당FDP보다 훨씬 많은 수를 득표해 제 3당으로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레스덴은 그 NPD의 본부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독일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가장 크게 분출되는 바로 그 투표일, 외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장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던 NPD 활동의 중심지를, 정말 멋도 모르고 방문했었던 것이다.

 

 작센 지방의 NPD와 베를린 외곽 지역 브란덴 부르크 지역의 DVU 등의 극우정당이 이번선거를 통해 높은 득표율로 의회에 진출하게 된 사건은 지금 현재까지도 독일 언론의 주요 논란거리다. 높아가는 실업률과 현 정권의 개혁정책에 대한 쌓여가는 불만 등으로 인해 점점 강해져가는 인종주의적, 반외국인적 감정들을 고려해서인지 이번 주말 티브이에선 악의 부상: 어떻게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되었는가라는 다규멘터리 드라마를 방영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드라마는 독일인들에게는 극우 정당의 의회진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섬뜻한 깨달음을 안겨었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게되기 까지의 사회적 분위기와 과정은 오늘날 내가 느끼는 독일의 그것들과 너무도 닮아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한 탕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던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의 NPD처럼, 완전히 합법적으로 지역 선거에서부터 자신의 지지기반을 쌓아왔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경제적 불안과 높은 실업율, 당시 바이마르 정권의 개혁조치에 대한 불만등에 쌓여있었고, 이를 유대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로 분출시키는 히틀러의 입장을 지지했었던 것이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NPD는 이미 독일의 젊은 학생들을 의식화, 조직화 하는 사업들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었다. 오전 수업밖에 없는 독일 학생들을 록 콘서트 등에 초대하거나, 함께 축구나 스포츠를 하는 클럽으로 조직해 이들로부터 자신들의 조직기반을 쌓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항공잠바와 대머리, 군화 등의 무식하고 공격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지금까지는 좌파 청년들의 복장이었던, 모자가 달린 헐렁한 잠바와 쌕을 매고, 심지어 좌파 집회나 토론회등에까지 참여하면서 이미지를 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이번 선거에서 선방한 NPD DVU는 함께 의회내에서 반외국인적 정책들을 관철시켜나가는데 연대해 활동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만일 이런 식의 분위기가 계속되어 어느날 극우 정권이 중앙 의회에까지 진출하게 된다면, 우린 독일을 떠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