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텍스트의 즐거움 : 롤랑 바르트

김남시 2004. 2. 21. 23:57

글로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글'이라고 하는 '내 것이 아닌'소유물. 글이 '내 것이 아닌'이유는 단지 그것의 존재가 나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은 고분고분 나의 애무를 받아들이다가도 불쑥 난폭하게 나의 신원 증명을 요구해 와 날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글은 익명성의 유혹적인 품 안으로 나를 손짓하지만, 때론 난폭하게 나의 알몸을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의 '까다로움'으로 인해,그러나 그것의 뿌리치기 힘든 매혹으로 인해, 글은 날 혼란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쓸수없다! 글은 나의 이야기를 아니,날 받아주지 않는다. 쓰여진 난, 어느새 낯선 공포가 되어 날 공격해 온다. 날 물어뜯고,할퀴곤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찢어진 나의 조각 속에서 그러나, 난 날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찢어진 세상만큼의 파편들,떠돌아 다니던 세상들,익명성의 조각들일뿐.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고통이라는 말은 도무지 고통스럽지 않다. 난 그 말로 나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다. 프로이드가 자신의 꿈이야기를 할 때 그는 이중적 담론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꿈 이론의 설명을 위해선,자신의 꿈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혀야 하는 반면,그것이 어쩔수 없이 드러내 보여줄 자신의 은폐하고픈 욕망을 검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이러한 사정은 모든 글쓰기에도 마찬가지다. 난 날 이야기하지만 또한 그럼으로써 날 은폐시킨다. 글은 검열의 흔적이다.


 

바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이러한 글쓰기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왔다. 그 자유는 글이 이미 하나의 기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글은 하나의 표지이며,표정이고 포즈이다. 카메라 앞에 서게될 때 우린 더이상 자연스러운 나 이기를 멈추고 하나의 포즈를 흉내내게 되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일으킬 의미 작용의 파문들에 대한 예견이자 기대인 것이다. 바르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의 글에는 기호로서의 숙명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기호의 초월성 속으로 자신을 은폐하려 들거나, 그것의 자의성에 괴로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기호로서의 글을 배열하여 그 기호를 통해 읽는 사람들이 얻게될 즐거움 - 그것도 일의적이지 않은 - 만을 말한다. 이러한 '표류적 글쓰기' 를 통해 생산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즐겁다. 그건 그가 늘 '즐거운 이야기'만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 문장, 이 이야기,이 단어를 즐겁게 읽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즐겁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즐겁게 쓰여진 그의 글은,놀랍게도 너무나 예민하게 우리 삶의 미세한 결들까지도 포착해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글이 주는 '환희'는 고요하지만 깊게 울린다. 이것이 바르트 텍스트의 매력이다.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그 사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 1막이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 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 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2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는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래도 그이/그녀는 -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에게 안 왔다고 나무랄 수 있게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3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또는 획득한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 는 명령을 받았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듯 하찮은 ,무한히 고백하기조차도 어려운 금지 사항들로 짜여 있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화장실에 갈 수도,전화를 걸 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없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삶,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내가 은행창구나 비행기 탑승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다면,나는 이내 은행원이나 스튜어디스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들의 무관심이 나의 종속 상태를 노출시키며 자극하기 때문이다...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오,"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X가 나를 두고 바캉스를 떠나더니 전혀 소식이 없다. 무슨 사고가 일어난 걸까? 우체국이 파업 중일까? 아니면 무관심,거리감을 두려는 전략,순간적인 충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또는 단순히 아무일도 아닌 걸까? 나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기다림이란 시나리오의 모든 막을 거친다. 하지만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내 혼란을(그때는 이미 끝난)감춰야 할까("좀 어떠세요?")? 아니면 그것을 공격적으로("그 처사는 옳지 못했어요. 당신은 - 할 수도 있었을 텐데"),또는 열정적으로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터뜨려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력나게 하지 않으면서 내 혼란을 넌지시 슬쩍 비춰야만 할까("좀 불안했어요")? 내 첫번째 고뇌에다 어떤 선전 문구를 택해야 할까 하는 두번째 고뇌가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중의 담론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그 고유의 구조적 성향으로 인해 나의 간청을 필요로 한다면,내 '정념'의 서정적 진술에,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까? 지나침,광기,그것이 내 진실이며 힘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진실,이 힘이 결국에 가서는 그를 감동시키는게 아닐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바로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게시판에서 이등차와 식당차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멀리 휘어진 플랫폼의 맨 끝쪽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였기에,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X를 감히 그 쪽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지나치게 신중한 행동처럼 보일 것이기에.)내가 거기로 데려가면,그는 내가 철도청의 법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소심한 사람으로 생각할는지도 몰라.게다가 게시판을 관찰하고,늦을까봐 두려워하고 역에서 당황해하고,이런 일들은 모두 늙은이나 정년 퇴직자의 괴벽에나 속하는 게 아닐까? 더구나 기차의 위치를 잘못 알았다면,저기 짐짝에 눌려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처럼 풀랫폼을 따라 달려가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까? 그러나 예상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 기차는 멀리 역의 맨 앞쪽에 멈추었고,그러자 X는 그에게 재빨리 키스하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눈에는,멀리 앞에 있는 객차의 뭉특한 후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기호도(그건 불가능했다.),작별 인사도 없었다.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역에 남아있는 일이 아무 소용없는 짓일 줄 알면서도,그는 감히 움직일 수도,플랫폼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일종의 상징적인 구속이,기차가 역에 있는 한 (X가 그 안에 있는)그에게 남아 있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그는 멍청하게 멀리 있는 기차만을 바라보며 꼼짝않고 서 있었다. 황폐한 플랫폼 위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채,마침내는 기차가 떠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기차보다 먼저 떠난다면,그건 그의 잘못이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의 글의 울림은 그의 예민한 감성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한 '자유로운 글쓰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어떠한 언어의 규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문법도,심지어는 없는 단어조차 그의 필요성을 위해서라면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순서라는 것이 없다. 짤막 짤막하게 이루어진 그의 글들 어디서부터 읽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렸다.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놓은 후 그의 감성은 그것이 이끄는대로 마음껏 표류한다. 난 언제쯤 글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