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젊은시절 당시 독일의 청년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벤야민이 1913년 청년운동 잡지 „출발“Anfang에 썼던 글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해 주는 글이라서 여기 올려봅니다.
'경험'이라는 무기로 우리들을 밀어붙이는 어른과 기성세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는 것 같군요. 경험과 시간이 인간을 패배적이고 보수적으로만 만든다는 게 사실인지,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게 변해갈수 밖에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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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면 쓴 사람과 책임을 둘러싼 우리의 싸움을 벌인다. 어른들은 ‚경험’이라 불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표정이 없고, 속이 안들여다보이며 언제나 같은 모양이다. 젊음과 이상, 희망과 여자 이 모든 것을 체험했던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은 모두 환상들이었다고. – 종종 우리는 그 말앞에서 주춤거리거나 좌절한다. 어쩌면 저 어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가? 우린 아직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우린 이제 저 가면을 벗겨보려 한다. 도대체 저 어른들은 무엇을 체험한 것인지? 도대체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하는지? 첫째는 이것이다. 그들 역시 젊었었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 역시 하고자 했었다고. 그들 또한 부모를 믿지 않았었지만 그 부모들이 옳았다는 것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한다. 좋은 의도를 가진 깨달은 자들은 너희에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리부터 우리의 삶의 시간들을 한심해하면서 그것이 달콤한 젊은 시절이자, 진지한 삶의 기나긴 무덤덤함 이전의 어린애같은 도취의 상태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린, 짦은 젊음의 시간을 즐겨서는 안된다며 스스로 후회하면서 말하는 다른 선생님들도 알고 있다. 그들은 진지하고 어두운 목소리로 우릴 벌써 삶의 의무들로 내몰려고 한다. 이렇게 저 어른과 선생님들은 모두 우리의 시간을 한심해하고 없애려 한다. 점점 더 우리에겐 ‚너의 젊은 시절은 다만 짧은 하룻밤에 불과하다’는 (그 시간을 충동과 도취로 채워라) 느낌이 엄습한다. 그 짧은 밤이 지나면 거대한 ‚경험’의 시간, 타협과 빈곤한 사유와 도약이 없는 그런 시간이 올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바로 그들이 그걸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 그들은 그걸 체험했다. 삶의 무의미함과 삶의 포악함이라는 단 하나만을. 그러나 그들은 다른 것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이 언제 거대하고 새로운 것, 미래지향적인 것을 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붇돋아 준 적이 있던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참됨과 선함, 아름다움은 그 자체 속에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렇다면 경험이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있다. 저 속물들은 결코 거대하고 의미있는 것을 갈망해본 적이 없고, 때문에 경험만이 그들의 복음서가 되었다. 경험은 그에게 삶의 평범함이라는 메시지만을 준다. 그는 결코 경험 말고도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될 수 없는 어떤 가치들 – 그들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 이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왜 저 속물들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 되었는가? 왜냐면 그가 다만 경험만을 알고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삶의 기대를 버리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가 다만 속물적이고, 영원히 보수적인 것 말고는 어떤 내적 관계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결코 경험을 통해 얻거나 잃을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오류였다고 하더라도 역시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 혹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념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의지를 뺏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한가지 점에서만은 저 피곤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희망을 포기한 부모들이 옳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음울한 것이 되고, 다만 경험할 수 없는 것 속에서만 용기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Geist은 자유롭게 될지 모르지만 언제나 늘 삶이 그 정신을 끌어 내릴 것이아닌가. 삶이, 경험의 총합으로서의 삶이 헛된 것이 될 것이기에 말이다.
이 질문들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저 정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저들의 지친 자아는 마치 파도와 같은 삶에 의해 절벽에 내동댕이 쳐진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정신을 통해 그 경험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실수와 오류에서 만족한다. „너는 결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다“ 라고 그는 탐구자에게 외친다. „내가 그렇게 체험했다“고. 그러나 탐구자에게 저 오류는 다만 진리를 향한 하나의 새로운 발판일 뿐이다.(스피노자) 경험이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은 다만 정신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어쩌면 경험은 진리를 향해 추구하는 이에게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경험은 그를 절망에 빠지게 하진 않는다.
결단코 그는 음울하게 체념하거나 속물들의 속삭임에 의해 잠들어 버리진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저 속물은 다만 모든 새로운 무의미만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니까. 정신이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확인할 때 그는 물론 옳았다. 그러나 저 속물은 다른 한편으로 그 누구보다도 정신 앞에서의 더 엄중하고 엄격한 비굴함 경외를 요구한다. 그가 무엇인가를 비판한다면 그를통해 그는 정신을 함께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가 마지못해 하는 정신의 경험조차도 그에겐 얼빠진 것이 될것이다.
그에게 말하시오
그가 남자가 되려 한다면
스스로의 젊은 시절의 꿈들에 대해 존중할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저 속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꿈들“이다. (센티멘탈한 감정은 대개의 경우는 이러한 혐오에 대한 보호색에 다름 아니다.) 그건 저 꿈들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처럼 언젠가 그를 불러내었던 정신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젊음이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그를 경고하고 있는 정신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그는 그 젊음이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저 움울하고 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 비웃도록 가르친다. 정신이 결핍된 ‚경험’은 불운할진 모르나 무엇보다 편안하니까 말이다.
다시한번 말해보자. 우리는 이와는 다른 경험을 알고있다. 그 경험은 정신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들을 짓밟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경험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선하며, 가장 강렬하다. 왜냐면 우리가 젊게 머무른다면 그 경험엔 결코 정신이 결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체험한다고 방랑의 막바지에서 짜라스트라는 말한다. 속물은 자신의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하나의 영원한 경험 곧, 결핍된 정신성에 다름 아니다. 청년은 정신을 체험할 것이다. 그가 힘들이지 않고 거대한 것에 도달하는 일이 적을수록, 그는 스스로의 방황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욱 더 많은 정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남자로서 관대해 질 것이다. 속물은 편협한 인간이다.
Aus : Walter Benjamin, Über Kinder, Jugend und Erziehung, shurkamp 1969
'경험'이라는 무기로 우리들을 밀어붙이는 어른과 기성세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는 것 같군요. 경험과 시간이 인간을 패배적이고 보수적으로만 만든다는 게 사실인지,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게 변해갈수 밖에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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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면 쓴 사람과 책임을 둘러싼 우리의 싸움을 벌인다. 어른들은 ‚경험’이라 불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표정이 없고, 속이 안들여다보이며 언제나 같은 모양이다. 젊음과 이상, 희망과 여자 이 모든 것을 체험했던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것은 모두 환상들이었다고. – 종종 우리는 그 말앞에서 주춤거리거나 좌절한다. 어쩌면 저 어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가? 우린 아직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우린 이제 저 가면을 벗겨보려 한다. 도대체 저 어른들은 무엇을 체험한 것인지? 도대체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하는지? 첫째는 이것이다. 그들 역시 젊었었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 역시 하고자 했었다고. 그들 또한 부모를 믿지 않았었지만 그 부모들이 옳았다는 것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한다. 좋은 의도를 가진 깨달은 자들은 너희에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리부터 우리의 삶의 시간들을 한심해하면서 그것이 달콤한 젊은 시절이자, 진지한 삶의 기나긴 무덤덤함 이전의 어린애같은 도취의 상태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린, 짦은 젊음의 시간을 즐겨서는 안된다며 스스로 후회하면서 말하는 다른 선생님들도 알고 있다. 그들은 진지하고 어두운 목소리로 우릴 벌써 삶의 의무들로 내몰려고 한다. 이렇게 저 어른과 선생님들은 모두 우리의 시간을 한심해하고 없애려 한다. 점점 더 우리에겐 ‚너의 젊은 시절은 다만 짧은 하룻밤에 불과하다’는 (그 시간을 충동과 도취로 채워라) 느낌이 엄습한다. 그 짧은 밤이 지나면 거대한 ‚경험’의 시간, 타협과 빈곤한 사유와 도약이 없는 그런 시간이 올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바로 그들이 그걸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 그들은 그걸 체험했다. 삶의 무의미함과 삶의 포악함이라는 단 하나만을. 그러나 그들은 다른 것은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이 언제 거대하고 새로운 것, 미래지향적인 것을 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붇돋아 준 적이 있던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참됨과 선함, 아름다움은 그 자체 속에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렇다면 경험이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있다. 저 속물들은 결코 거대하고 의미있는 것을 갈망해본 적이 없고, 때문에 경험만이 그들의 복음서가 되었다. 경험은 그에게 삶의 평범함이라는 메시지만을 준다. 그는 결코 경험 말고도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될 수 없는 어떤 가치들 – 그들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 이 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왜 저 속물들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 되었는가? 왜냐면 그가 다만 경험만을 알고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삶의 기대를 버리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가 다만 속물적이고, 영원히 보수적인 것 말고는 어떤 내적 관계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결코 경험을 통해 얻거나 잃을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오류였다고 하더라도 역시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 혹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념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의지를 뺏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한가지 점에서만은 저 피곤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희망을 포기한 부모들이 옳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음울한 것이 되고, 다만 경험할 수 없는 것 속에서만 용기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Geist은 자유롭게 될지 모르지만 언제나 늘 삶이 그 정신을 끌어 내릴 것이아닌가. 삶이, 경험의 총합으로서의 삶이 헛된 것이 될 것이기에 말이다.
이 질문들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저 정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저들의 지친 자아는 마치 파도와 같은 삶에 의해 절벽에 내동댕이 쳐진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정신을 통해 그 경험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실수와 오류에서 만족한다. „너는 결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다“ 라고 그는 탐구자에게 외친다. „내가 그렇게 체험했다“고. 그러나 탐구자에게 저 오류는 다만 진리를 향한 하나의 새로운 발판일 뿐이다.(스피노자) 경험이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은 다만 정신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어쩌면 경험은 진리를 향해 추구하는 이에게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경험은 그를 절망에 빠지게 하진 않는다.
결단코 그는 음울하게 체념하거나 속물들의 속삭임에 의해 잠들어 버리진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저 속물은 다만 모든 새로운 무의미만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니까. 정신이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확인할 때 그는 물론 옳았다. 그러나 저 속물은 다른 한편으로 그 누구보다도 정신 앞에서의 더 엄중하고 엄격한 비굴함 경외를 요구한다. 그가 무엇인가를 비판한다면 그를통해 그는 정신을 함께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가 마지못해 하는 정신의 경험조차도 그에겐 얼빠진 것이 될것이다.
그에게 말하시오
그가 남자가 되려 한다면
스스로의 젊은 시절의 꿈들에 대해 존중할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저 속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꿈들“이다. (센티멘탈한 감정은 대개의 경우는 이러한 혐오에 대한 보호색에 다름 아니다.) 그건 저 꿈들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처럼 언젠가 그를 불러내었던 정신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젊음이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그를 경고하고 있는 정신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그는 그 젊음이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저 움울하고 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 비웃도록 가르친다. 정신이 결핍된 ‚경험’은 불운할진 모르나 무엇보다 편안하니까 말이다.
다시한번 말해보자. 우리는 이와는 다른 경험을 알고있다. 그 경험은 정신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들을 짓밟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경험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선하며, 가장 강렬하다. 왜냐면 우리가 젊게 머무른다면 그 경험엔 결코 정신이 결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체험한다고 방랑의 막바지에서 짜라스트라는 말한다. 속물은 자신의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하나의 영원한 경험 곧, 결핍된 정신성에 다름 아니다. 청년은 정신을 체험할 것이다. 그가 힘들이지 않고 거대한 것에 도달하는 일이 적을수록, 그는 스스로의 방황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욱 더 많은 정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남자로서 관대해 질 것이다. 속물은 편협한 인간이다.
Aus : Walter Benjamin, Über Kinder, Jugend und Erziehung, shurkamp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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