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아담)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 16-17)
그러나, 신에 의해 지음을 받는 최초의 인간들은 저 열매를 먹지 말라는 신의 계율을 어기고 급기야 뱀의 유혹에 빠져 저 금지된 실과를 따먹으니, 그로부터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을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에덴동산의 인간들이 행한 이 최초의 반역은 그들의 후손들의 삶에 이처럼 길고도 어두운 그림자, 그 이후로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평생동안 고통스럽게 속죄하여야 할 '원죄'를 잉태시킨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창세기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의 성격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지배하면서 살아갈 세계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세기 1장 28-29)를 만들어주신 창조주와 맺은 언약을 - 배은망덕하게도 - 어기고 금지된 실과를 따먹었다. '너는 너 실과를 먹지 말라'는 창조주의 도덕적 명령 대신에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따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실과를 따먹은 것이다. 신의 계율과 신과의 언약을 준수하며 영위할 수 있었을 에덴동산에서의 평화로운 삶 대신에 고통스러운 잉태와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저 도덕적 타락의 결과 인간이 치루어야 할 죄의 댓가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음성을 하나의 도덕적 금지로 이해한다면 그를 어긴 죄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그건 악을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금지는 선악이 공존하는 세계를 전제로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본성적으로 선한 것들이라면 '저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금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도덕적 계율, 신의 음성은 물들거나 빠져들어서는 안될 악 혹은 악한 존재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이러한 신의 도덕적 금지를 준수했더라면 그들은 신이 마련해준 선의 영역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저 도덕적 금지를 어김으로써 그들은 신 곧, 선의 영역을 벗어난 악의 촉수에 손을 더럽힌 것이며 그것이 그들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이유다.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에서 칸트는, 인류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미성년 상태'(계몽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답변)에서 탈출시키려 했던 계몽의 주창자답게 인류를 저 무거운 원죄의 속박으로부터도 벗겨내려고 시도한다.
그 첫 번째 걸음은 '저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음성을 도덕적 금지가 아니라 '모든 동물이 복종하고 있는 본능'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그 본능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토끼는 물고기를 잡아먹으려 애쓰지 않으며, 소는 들에 난 독버섯을 구태여 뜯어먹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동물들은 생존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에게 자신의 음성을 통해 이 '본능'을 심어주었으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창조주에 의해 보장된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저 열매를 따먹지 마라'는 창조주의 음성은 곧 '그 열매를 먹으면 네가 죽으리라'는 뒷말과 더불어 인간에게 허락된 '본능'을 지시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 따라 살아간다면 인간에겐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고도 안전한 생존이 보장될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창세기의 창조주는 과실을 따먹는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열매의 섭취가 가져오게 될 자연적 귀결에 대해 - 친절하게도 - 최초의 인간들에게 귀뜸 해준 것일 뿐이다. 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당위적, 도덕적 금지로 받아들인 것은 그 말 속에 배어있는 창조주의 깊은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스피노자는 '저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음성을 어리석게도 '도덕적 금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아담을 비유로 들어, 자연전체의 질서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 의식의 불완전성에 대해 비판한다. 인간 정신은 세계와 자연 전체의 필연적 연관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간적 관점에 의거한 편견에 따라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자기네들과 똑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상정할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에티카 1부 부록) 이러한 편견은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을 모르며, 모든 인간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가지고있으며 동시에 이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신 역시 만사를 어떤 목적을 위해 그가 욕구하는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고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음성이 무엇인가를 욕구 하려는 신의 도덕적 금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주는 것 일뿐만 아니라 신의 완전성을 훼손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은 '다만 자기 본성의 제 법칙에 의해서만 행하고, 어떠한 것에도 강제되어 행하는 일이 없'(1부 정리 17)는 완전성을 본성으로 하고 있는 '자기 원인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복종하고있는 이 본능에만 순응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겐 '본능의 한계를 넘어, 본능이 지시하는 것을 넘어있는 것까지에로 자신의 지식을 확장시키려하는'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에게 창세기 원죄의 신화는 자연과 신의 음성으로 상징된 본능의 한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한 인간 이성의 발현으로 이해되게 된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동물들이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는 점에서 구속적 존재인것과는 달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을 넘어섬으로써 자유로운 존재로 남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도덕을 갖고 그에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장 기본적 척도다.
기이하게도 스피노자는 동일한 출발로부터 칸트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의 자유는 그에겐 인간의 '불완전성'의 지표에 다름아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필연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우연성으로부터 선택해야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에 완전히 자신의 존재가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의지한다는 것, 무엇인가를 목적한다는 것은 자신이 목적하고 의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존재, 모든 것을 자신 속에 함유하고 있는 존재는 따라서 그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그에겐 아무것도 결핍되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에게 신은 필연적 존재이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신의 행동과 섭리가 이렇게도 할 수있고 저렇게도 할 수있는 가운데 선택한 것이라면, 그렇게 이루어진 신의 행동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 세계가 신의 의지에 따라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 그건 이 세계의 필연성과 나아가 신의 필연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신의 창조가 필연적인 것처럼 신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도 필연적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역시 필연적이다. 신은 세계를 창조함과 동시에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그 존재의 필연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내가 필연적인 것처럼, 내 행동은 필연적인 연관에서부터 나왔다. 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원인에 의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그 원인 나아가 그 행위의 귀결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 연관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다.
그러나, 칸트나 스피노자나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간 ‘감정 혹은 욕구’의 비이성적 성격이 그것이다. 스피노자의 주 저작이 “윤리학”인 이유도, 칸트에게서 윤리적 인간이 자신의 본능적 욕구나 감정을 규제할 수 있는 인간인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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