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을 읽었다.
웃음, 희극적인 것이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에서 나온다는 통찰은 놀랍다. 변화하는 상황과 현실에 대해 방심하고,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덕택에 발생하게되는 행위들이 희극적인 행위, 웃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엉덩방아를 찧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기도 전에 성급하게 말함으로써 실수하거나, 상대를 오인함으로써 희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들을 생각해보면 이를 알 수있다. 나아가 이는 직업적 습관이 일상적 삶 속에서도 계속 작용하거나,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갑자기 그의 ‚육체‘가 전면에 나서거나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희극적인 것은 삶과 생명적인 것의 긴장감에 대한 상실과 방심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교정의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 희극적인 장면을 보고 웃음을 얻을 수 있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대상에 대한 지적인 태도이다.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은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면 그 행동은 전혀 웃음을 자아내지 못할 것이다. 많은 희극적인 장면은 우리가 그에 감정이입을 해 본다면 당사자에게 큰 감정적 분노, 당혹,수치,곤란, 고통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알수 있게된다. 그런 장면들에서 우리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에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지적인, 무감정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행동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인물이나 사건, 행위들은 그것을 행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내적 감정상태에서가 아니라, 다만 드러나진 기계적인 결과로만 고찰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제 이를통해 개그 콘서트의 '아이스맨'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아이스맨이 내게 어떤 웃음을 자아내지 않는 것은 그에게 내가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말하듯, 서른 다섯의 나이에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단역으로나마 출연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무능력한 개그맨이다. 그가 하는 말은 사람들을 웃기지 못하며, 그의 자의식적인 행위는 과장되고 유치하며, 진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웃음을 웃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개그맨으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무감각적이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이 정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한 사람의 육체로 향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이나 다 희극적이다“ 비장한 연설 도중의 재채기 하기, 장례식 도중 코풀기, 예배시간에 코골기 등. 신체에 대한 배려가 희극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비극 혹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연극 등에서 주인공들의 탈육체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육체와 육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는 추구되는 정신성과 육체를 대비시킴으로써 웃음을 효과를 불러낸다.
동물원에서 살아있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보는 데서 느껴지는 매력은 그 동물들의 완벽한 육체성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육체성을 보여주며,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서 저 완벽한 육체성이 발현된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생존, 곧 육체성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완벽하게 기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육체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바로 그러한 육체성의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불필요한 혹은 잉여적인 움직임, 그저 재미삼아, 그냥, 심심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 저 완벽한 육체성의 합목적성의 발현에 우린 매료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인간 역시 육체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규제되고 사회화되었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육체성의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재채기, 기침, 콧물, 발기, 코골기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성의 한 가운데서 이러한 육체성이 폭로되는 장면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를통해 우리 육체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생명적인 것 속에서 기계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 뚱뚱한 몸 등 희극배우 중에는 유달리 육체적 특징을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못생긴 얼굴을 한 희극 배우는 그 스스로가 극중에서 ‚비장한 연설도중에 발생한 재채기‘의 역할을 한다. 멋지게 준비한 결혼식장에서 처음 드러난 신부의 못생기고 뚱뚱한 얼굴은 한순간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예식과 노력을 ‚육체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희극적인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다른 사람의 특정한 얼굴표정, 제스쳐, 몸동장을 흉내내는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 역시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의 틀로 설명가능하다.
그렇게 ‚흉내내어지는‘ 목소리, 표정, 제스쳐, 몸동작은 그 살아있는 인물에게서 특정한 고정적인 것,특징적으로 고착된 것,전형적인 것으로 포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흉내내어지는 인물을 그 순간 그 목소리,표정,제스쳐, 동작 등으로 ‚고정된 것‘으로 드러내며, 그 인물은 그 순간 특정한 목소리,제스쳐, 동작, 표정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희극배우는 자의식적이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그는 자의식적으로 보여져서는 안된다. 그의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한에서이다. 말하자면 그는 방심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행하며, 그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 걸맞지 않을때 그러한 경직성에 대한 사회적 조롱으로서 웃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옥동자는 이런 점에서 완벽한 희극배우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눈에 띄게 못생긴 그의 얼굴과 작은 키는 부각되는 육체성을 가진 전통적인 희극배우로서의 기본요소이며, 게다가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의식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스스로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의도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현재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이를 부족한 연기력으로 메꾸려는 개그맨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불편함을 생각해보면 그의 특징은 더욱 부각된다.
웃음, 희극적인 것이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에서 나온다는 통찰은 놀랍다. 변화하는 상황과 현실에 대해 방심하고,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덕택에 발생하게되는 행위들이 희극적인 행위, 웃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엉덩방아를 찧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기도 전에 성급하게 말함으로써 실수하거나, 상대를 오인함으로써 희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들을 생각해보면 이를 알 수있다. 나아가 이는 직업적 습관이 일상적 삶 속에서도 계속 작용하거나,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갑자기 그의 ‚육체‘가 전면에 나서거나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희극적인 것은 삶과 생명적인 것의 긴장감에 대한 상실과 방심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교정의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 희극적인 장면을 보고 웃음을 얻을 수 있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대상에 대한 지적인 태도이다.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은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면 그 행동은 전혀 웃음을 자아내지 못할 것이다. 많은 희극적인 장면은 우리가 그에 감정이입을 해 본다면 당사자에게 큰 감정적 분노, 당혹,수치,곤란, 고통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알수 있게된다. 그런 장면들에서 우리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에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지적인, 무감정적이고 무감각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사건, 행동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인물이나 사건, 행위들은 그것을 행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내적 감정상태에서가 아니라, 다만 드러나진 기계적인 결과로만 고찰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제 이를통해 개그 콘서트의 '아이스맨'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아이스맨이 내게 어떤 웃음을 자아내지 않는 것은 그에게 내가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말하듯, 서른 다섯의 나이에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단역으로나마 출연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무능력한 개그맨이다. 그가 하는 말은 사람들을 웃기지 못하며, 그의 자의식적인 행위는 과장되고 유치하며, 진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웃음을 웃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개그맨으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무감각적이고 무감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이 정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한 사람의 육체로 향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이나 다 희극적이다“ 비장한 연설 도중의 재채기 하기, 장례식 도중 코풀기, 예배시간에 코골기 등. 신체에 대한 배려가 희극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비극 혹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연극 등에서 주인공들의 탈육체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육체와 육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는 추구되는 정신성과 육체를 대비시킴으로써 웃음을 효과를 불러낸다.
동물원에서 살아있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보는 데서 느껴지는 매력은 그 동물들의 완벽한 육체성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육체성을 보여주며,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서 저 완벽한 육체성이 발현된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의 생존, 곧 육체성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완벽하게 기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육체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바로 그러한 육체성의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불필요한 혹은 잉여적인 움직임, 그저 재미삼아, 그냥, 심심해서 이루어지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 저 완벽한 육체성의 합목적성의 발현에 우린 매료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인간 역시 육체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규제되고 사회화되었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육체성의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재채기, 기침, 콧물, 발기, 코골기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신성의 한 가운데서 이러한 육체성이 폭로되는 장면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를통해 우리 육체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생명적인 것 속에서 기계적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 뚱뚱한 몸 등 희극배우 중에는 유달리 육체적 특징을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못생긴 얼굴을 한 희극 배우는 그 스스로가 극중에서 ‚비장한 연설도중에 발생한 재채기‘의 역할을 한다. 멋지게 준비한 결혼식장에서 처음 드러난 신부의 못생기고 뚱뚱한 얼굴은 한순간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예식과 노력을 ‚육체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희극적인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다른 사람의 특정한 얼굴표정, 제스쳐, 몸동장을 흉내내는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 역시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의 틀로 설명가능하다.
그렇게 ‚흉내내어지는‘ 목소리, 표정, 제스쳐, 몸동작은 그 살아있는 인물에게서 특정한 고정적인 것,특징적으로 고착된 것,전형적인 것으로 포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흉내내어지는 인물을 그 순간 그 목소리,표정,제스쳐, 동작 등으로 ‚고정된 것‘으로 드러내며, 그 인물은 그 순간 특정한 목소리,제스쳐, 동작, 표정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희극배우는 자의식적이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그는 자의식적으로 보여져서는 안된다. 그의 행위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그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한에서이다. 말하자면 그는 방심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행하며, 그것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 걸맞지 않을때 그러한 경직성에 대한 사회적 조롱으로서 웃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옥동자는 이런 점에서 완벽한 희극배우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눈에 띄게 못생긴 그의 얼굴과 작은 키는 부각되는 육체성을 가진 전통적인 희극배우로서의 기본요소이며, 게다가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의식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스스로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의도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현재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이를 부족한 연기력으로 메꾸려는 개그맨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불편함을 생각해보면 그의 특징은 더욱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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