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소통)에 대한 루만과 하버마스의 차이
루만과 하버마스는 모두 의사소통이 지각과 정보의 차원에서 아니라, 그 지각, 정보, 감정 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 또는 ‚외화’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적 소통주의자들이다. 곧 소통이란 의미있는 방식으로 외화되고 전달된 정보로 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외화 또는 전달되지 않은 혹은 그러지 못한 부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있어서 루만과 하버마스는 대립되는 입장을 보인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소통은 투명한, 자신의 모든 주관성을 소통의 장 속에 완전하게 외화시키고 드러내는 소통의 가능성을 희망한다. 만일 어떤 소통주체가 외적인 혹은 내적인 이유로 인해 자신을 자유롭게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 소통은 왜곡되고 그로부터는 상호협동적 이해를 통해 동의에 도달되는 소통적 합리성이 도출될수 없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왜곡된 소통의 예로 남편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부인이 그러나 자신의 진실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를 들고있다. 그녀는 내적인 억압이라는 기제를 통해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며 그를통해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의 소통은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정치적, 외적 억압, 강제 역시 이러한 왜곡된 소통의 기제이다. 이처럼 주체들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완전하게,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내적, 외적 지배와 억압들이 인간의 현실적 의사소통을 왜곡시키며, 이러한 의사소통적 관계로부터 도출되는 소통적 합리성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한다.
루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외화되거나 전달되지 못한 체계의 ‚체험 Erleben의 차원이 존재한다. 이는 하나의 체계가 사건과 사실들을 자신의 Umwelt에 관계시킴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달되고 외화되지 않는 한 다른 체계에 의해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루만에 의하면 18세기 말엽에 소통이 개인화되는 경향이 뚜렸해졌다. 곧 화자는 이제 타인에 의해 관찰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세계연관에 있어 준거점으로 삼기시작했다. 다른 이들에 의해 인정받을수 있는 유용하고, 가치있는 사실들에 준거하는 대신, 그러한 사실들 혹은 사태들이 개인에게 갖는 개인적, 사적의미들에 집착하기
'읽을수 있는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0) | 2004.02.22 |
---|---|
텍스트의 즐거움 : 롤랑 바르트 (0) | 2004.02.21 |
<번역> 발터 벤야민의 "경험" (0) | 2003.09.28 |
베르그송과 개그 콘서트 (0) | 2003.09.19 |
원죄:칸트와 스피노자의 창세기 해석 (0) | 200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