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세상의 아름다움은 누가 보증해주는가?

김남시 2000. 6. 30. 10:52
우린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가치들이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해왔으며 심지어 역전되기조차 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그건 그 가치들이 현재 우리의 삶에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있는 우리들에겐 형이 죽은 후 형의 아내를 첩으로 맞아들이는 '형사취수'의 관습이나 일부다처제의 전통이 격에 맞지 않고 부도덕하게 느껴지는 것도, 음식물 앞에서 자신의 욕구를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지 않던 중세이전의 풍습이 야만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현재 우리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 가치의 '현실적 실천성'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릴 당황하게 하는 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히 '아름다운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이 예전엔 그렇지 않았으며, 심지어 '추한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진, 선, 미의 가치가 영원하며 보편적이지 않으며, 그 중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의 감성이 더욱더 역사적 가변성을 지니며 변화해왔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불변한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오늘날 많은 이상주의자들에게 끊임없는 아름다움과 환상의 공간을 제공해주는 자연, 그 중에서도 산과 바다는 그러나, 처음부터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영원히 축복받은 천상의 세계와 그 세계로부터 저주받은 땅위의 어두운 세계라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연은 결코 '아름다움으로 인해 찬탄되는' 대상일 수는 없었다.

플라톤에 의해 이 세계에 '영원한 이데아 세계의 헛된 반영'이라는 낙인이 찍인 후, 기독교는 거기에 죄악과 욕망으로의 유혹으로 가득 찬 저주받은 세계의 어두운 이미지를 유포시켰다.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맛과 향기, 감미로운 소리와 현란한 색채는 우릴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악과 유혹의 세계로 이끌어갈 사탄의 속삭임이었다. 더구나, 바다는, 타락한 땅위의 모든 생명들을 수장시킨 노아의 홍수 이후,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던 물들이 다 빠져나가지 않고 모여있는 장소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저 광할한 바다는, 창조된 세계가 겪었던 신의 저주의 흔적이자, 앞으로 언젠간 다시 일어날 또 한차례의 재앙을 위한 물의 저장고였다. 지금처럼 인류가 또다시 사탄과 이교의 타락에 빠져든다면, 저 엄청난 물이 이 땅위를 덮쳐 오를 것이다.

산은 인간의 얼굴에 난 흉터나 부스럼처럼, 신이 창조한, 완전했던 세계에 피어난 곰보자국 같은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대재앙의 홍수 때 쓸려나간 생물과 흙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며, 매끈함으로써 완벽했던 신의 작품을 시기한 사탄의 저주의 가래침일지도 모른다. (1609년, 갈릴레이가 개량해낸 망원경을 통해 태양표면에 검은 반점들이 있으며, 달에는 울퉁불퉁한 산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세인들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천상의 행성들의 완전무결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변화시켜야 했다.)

우린, 저 유명한 르네상스인이자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불리는 페트라르카가 1300년경 방뚜산을 등정했을 때의 일화를 알고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던' 당시, 페트라르카는 목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신만고 끝에 구름이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올랐다. 당시 어디서도 쉽게 체험할 수 없었을,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광활한 풍경 앞에서 우리의 르네상스인 페트라르카는 그러나, 풍경의 아름다움도,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감격스러움도 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자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한 대목을 떠올리며 명상에 잠긴다.

그건 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밖으로 향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로 회귀하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있나니.) 라는 중세적 격언이었다. 카시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에의 충동이나 자연을 직접적으로 관조하려는 욕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 즉 그러한 것은 유일하게 참되고 직접적인 영혼과 신의 관계를 흐릴 뿐이라는 저 경고로 인해 움츠려든다."

자연에 대한, 감각적이고 외적인 세계에 대한 모든 접근을 저지하고 있던 저 거대한 신학적 경고는 최초의 근대적 인간 페트라르카의 자유로운 감성까지도 이렇게 묶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아무 저항감 없이 즐길 수 있기 위해선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 즉 자연은 신의 영역인 초감각적 세계와의 관련성을 통해 그 진정성을 보증 받아야 했다.

감각적 자연세계는 신적 존재의 흔적이자 그 능력의 반영일 뿐 아니라, '신이 직접 쓴 책'이라는 신비주의적 관념은 역설적으로 자연에 대한 경험적 탐구의 정당성을 확보해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경험과 감각적 지각을 통해 그 세계를 파헤침으로써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신의 메시지를 해독해내려 했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새로운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이념을 통해 자연의 얼굴에 찍혀있던 죄와 욕정의 낙인을 벗겨내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신의 사랑은 신의 피조물인 삼라만상과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실현된다. 이를 통해 "사랑은 더 이상 존재의 원천이자 초월적 근원인 신에게로만 향한 것이거나, 도덕적 관습적인 인간끼리의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즉 동물과 식물, 해와 달, 원소들과 자연의 힘 등에 고루 충만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존재의 <부분들>이 아니라 신비적 사랑의 열로 인간, 그리고 신과 더불어 한데 녹아든다. 그에게는 물고기나 새, 나무나 꽃은 물론, 바람과 물까지도 인간의 '형제자매'들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초월적 존재에 의해 보증 받으려는 욕구는 이제 라이프니츠에 의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게 된다.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은 그 본성상 모든 것들이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작용하기를 의욕한다. 사물들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현존하고 있는 까닭은 이 상태가 바로 가장 완전한 것을 선호해야 하는 신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완전한 신에 의해 가장 최선의 것으로 선택된 세계이다. 우릴 즐겁게 하는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은 따라서, 신의 세계를 훼손시키는 어두운 사탄적 유혹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최선의 세계로 선택된 이 세계의 완전성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는 고귀한 징표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제 마음껏 아름다움이 주는 쾌락을 즐길 수 있다. 그건 가장 완전한 신이 인간을 위해 배려해놓은 기쁜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주는 매력과 기쁨을 안심하고 향수하기 위해서 인류는 저 거대한 초월적 세계 의 이념을 필요로 했었다. 신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세계, 신이 더 이상 우리의 보호자가 아닌 세계, 아니 더 이상 신에게 보호받지 않으려는 세계에서 이제 '아름다움'은, 그에 대한 향수는 누구에 의해 보증되는가? 그것이 우릴 욕정과 죄로 이끌어갈 사탄의 속삭임이 아님을 누가 확인해주는가? 평론가, 혹은 검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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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에른스트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코플스턴, <합리론>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