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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이 헤피 엔딩인 이유

김남시 2004. 5. 10. 07:15
 

심청전에서 심봉사는 자신의 딸인 심청이 태어날때부터 이미 장님이었다. 그는 태어난 자신의 딸의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자식에 대해 갖는 감정은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가 보고 싶다’라고 말할 때의 그런 것과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심봉사에게 있어 딸 심청에 대한 관계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자신의 품안에 안아보았을때 느껴지던 그의 체온, 움직임 등 주로 청각적이고 촉각적 감각에 의거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일반인인 우리가 자식들에 대해 갖는 애착 혹은 감정과는 어떤 점에선 더 애착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딸 아이가, 다만 그의 소리와 육체적, 촉각적 방식으로 전해지는 그의 존재에만 익숙해있던 딸 아이가, 공양미 삼백석 때문에 인당수에 몸을 던지려 집을 떠났을 때 심봉사에겐 어떤 그리움의 감정이 일어났었을까? 그는 자신이 한 번도 본적이 없던 자식이 ‚보 고’싶었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감정은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었을까?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우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를 ‚만지거나 느끼지’ 못하는 상대를 대신해 그의 ‚사진’을 혹은 예전 같으면 그의 ‚그림’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은 단지 그 상대가 지니는 외면적, 객관적 외관에 대한 시각적 정보들의 집적과는 다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의 ‚정체성’을, 내가 그에게 갖는 애착과 애정의 모든 관계들을 포함하는 깊은 의미론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이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사진이나, 머리 속으로 떠올려보는 연인이나 가족의 ‚모습’은 우리와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졌던 모든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상기시켜 주는 기억에로의 통로가 된다. 우린 우리가 떠올려 본 그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사진’을 통해 그들과 나누었던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를통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재차 그들과의 관계와 떼어질 수 없는 것으로 공고화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그들 모습에 대한 ‚시각적 기억’이다. 우린 그들을 본 적이 있으며 그를통해 우리에게 있어 그들은 이러한 시각적 기억을 통해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의 딸 심청을 봉사잔치가 벌어지는 대궐 안에서 맞닥뜨렸을 때 심봉사의 가슴을 울렸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로 하여금 자신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딸 심청의 모습을 ‚보고싶게’했던, 장님이었던 눈이 떠 질 정도로 강렬하게 그를 덮쳤던 저 욕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가 „아니, 그럼 네가 정말 내 딸 청이란 말이냐? 어디보자, 어디 내 딸 얼굴 한번 보자. 청아 청아!“(<효녀심청> 2003리틀랜드 편) 라고 외치며 눈을 떳을때 심봉사에겐 죽은줄로만 알고 있었던 딸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감정이 가장 컸을 것이다. 어차피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딸의 모습을 이제 그가 본다고 해서 그에게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자신의 딸 임을 확인할 길은 없다는 점에서 이때 그의 ‚보는’행위는 다만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심봉사에게 있어 딸 심청에 대한 기억은 다만 청각적이고 촉각적 기억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따라서 그의 딸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들어보거나,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심봉사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은 오히려 다른 위험부담을 안고있는 것이기도 했다. 청각과 촉각적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딸 심청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됨으로써 어쩌면 심봉사는 자신의 딸을 낯설게 느끼게 될지도 모를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 심청이는 궁궐에 살고있는 높은 신분의 부인이 아닌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오이디프스에게 그것이 자신의 비극적 삶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보려는 몸부림이었다면, 이제 왕후가 된 딸 앞에서 눈을 뜨게되는 심봉사는 지금까지 그가(그리고 그의 딸 심청이) 배제되어 있었던 새로운 삶의 운명으로 진입하게 됨을 상징한다. 그것은 심봉사와 심청이에겐 지금까지 그들이 맺어왔던 관계- 청각적, 촉각적 접촉을 통한- 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심봉사에게 그것은 홀아버지 장님으로써 동냥 젖을 얻어 먹이며 키워왔던 자식에 대한 그의 애착과 집착을 시각적 바라봄으로 상징되는 거리를 둔 관조적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고, 힘겹게 자신을 키운 아버지에 대한 부채감 - 그것이 심청으로 하여금 앞 못보는 아버지를 두고 인당수에 몸을 던짊으로써 아버지의 눈을 뜨이게 하려는 극단적 결심을 감행하게 했다. - 을 안고있던 심청이는 그 부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에 대한 건강한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전이 헤피엔딩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