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그리이스 비극과 카프카의 세계

김남시 2004. 8. 2. 23:22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날 아침 자신이 거대한 한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해 있는 걸 발견한다. 도대체, ,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는 출근하지 못해 회사에서 쫓겨나 돈을 벌지 못한다면 자신 가족에게 닥칠 어려움과 곤란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먼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신을 향해 운명을 한탄하는 울분을 터뜨리곤, 과연 자신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혹은 어떤 보이지 않던 운명이 신을 분노케 했는지 신탁을 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한 오디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듯 그렇게 그리이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저 운명적 사태를 '비극적으로'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이스 인들에게 삶의 비극은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과 순수하게 부닥친다. 그건 죽음이라는 결말로 치닫고, 관객들은 저 어쩔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서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린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다가온 운명의 무게를 진지하 장중하게만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나 할일이 많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고달픈 삶의 주인공들이다. 그레고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변신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보다는 가족들이 받게 될 어려움과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그에겐 자신의 변신을 탓하거나 그에게 울분을 터뜨릴 신들도, 혹은 뼈저리는 후회의 눈물을 흘릴만한 신들의 노여움을 산 과거의 행동도 없다.

카프카가 그려내는 세상엔 그리이스 비극에서처럼 언제나 분명한 원인도, 운명을 바꿀만한 운명적 사건도, 그 모두의 배후에서 인간사를 바라보고 있는 신들도 없다. 카프카의 세계, 그리고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엔 다만,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 처리해야 할 일들과, 그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닥쳐올 실직의 위험, 그리고 나의 실직이 내 가족들에게 가져다 줄 삶의 곤궁들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어느날 아침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사건을 '비극적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유는 하릴없는 신들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팍팍하게 살아가야 할 인간 세계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 우릴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분노 혹은 장난, 영웅의 고양된 의지와 숭고한 행위들이 사라지고 없는 카프카의 세계엔 다만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 <심판>에서의 판결문, <변신>에서의 변신, <>에서의 명령 등 - , 우리의 주인공들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의 진탕에서 허우적 거리게 만드는 사건들일 뿐이다.

형이상학적 운명세속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 데에 카프카가 날카롭게 그려내는 현대적 삶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다만 재수가 없어, 운이 나빠서 내게 떨어진 사건이다. ‚운명은 그에 대해 신에게 울분을 터뜨리거나 호소할 수 있는 반면, ‚사건은 어떻게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우린 다만, 이젠 신과 인간을 중개해주는 역할을 오래 전에 상실해버린 세속적 점장이들에게 그들은 심지어 로또 번호를 맞춰 주기도 한다! – 조언을 구해 심리적 명분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릴 괴롭히고, 방해하며, 귀찮게 하는 인간들 쌍둥이 형제“! – 말고, 위험에 빠질 때마다 오딧세이에게 나타나 도움을 주는 여신과 같은 그 어떤 믿음직한 신적 조력자도 갖지 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