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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힘과 기억의 노예 : 영화 올드보이

김남시 2005. 2. 3. 05:03

니체는 역사를 직접적 생의 발양을 가로막고 현존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소위 교양의 이름으로 강요되던 넘쳐나는 과거역사에 대한 지식과, 현존하는 것을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목적론을 통해 정당화시키던 헤겔식의 목적론적 역사관은 니체에겐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냉소적 긍정으로 이어지는 숙명론을 낳는 시대의 질병이었다. 19 세기를 지배하던 역사의 진보와 목적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사건과 삶들을 저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현재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과거에 대한 강요된 기억으로서의 역사적 지식은 생의 직접성을 가로막고, 새로운 것과 창조적인 것을 .어차피 과거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는 냉소주의를 통해 부정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이제 직접적 생에로의 진전을 가로막는 역사와 기억이 아니라, 삶에의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며 우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비 역사와 망각이다. 망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철두철미 역사적이기만 한 인간은 마치 .잠을 자지 않도록 강요된 사람“이나, .되새김질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되새김질을 통해서만 살아야 하는 짐승“ 과 같다. 역사는 삶에 기여해야지 삶이 역사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지나친 역사는 오히려 삶을 해친다. 기억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짐승들이 보여주듯 아무런 기억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망각이 없이 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니체는 망각을 우리의 에너지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에로 집중하게 하는 적극적 능력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이러한 기억의 소화불량으로 고통받지 않는 건강한 망각의 인간이었다. 그에겐 술을 먹고 경찰서에 가고,행패와 패악을 부려도 그를 잊고, 다시 삶에 매진하게 하는 망각의 힘이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결핍되어 있는 저 망각의 능력을 통해 늘 현재에,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이 망각의 힘은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하던 고통스 15 년의 감금생활을 통해 점점 쇠퇴해간다. 그는 점점 이전의 망각의 힘을 잃고 기억의 노예로 변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면서 누가 자신을 이렇게 증오했었는지 기억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래도 떠오르지 않는 과거로 인해 그는 점점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대한 막연한 복수를 꿈꾸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감금방에서 풀려난 후에도 오대수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억을 쫓도록 강요된다. 15년간 먹었던 만두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리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작은 실마리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쫓아다녀야 한다. 망각의 힘을 잃고 과거에 묶인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진우의 복수의 핵심이 있었다.

 

이진우에겐 오대수가 가지고 있던 망각의 힘이 없다. 그는 과거를 망각하지 못하고, 의 삶 전체는 과거의 기억으로, 그 과거에 대한 복수를 향해있다. 그의 현재는 다만, 저 과거를 위한, 기억의 복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복수는 오대수가 가지고 있던, 그래서 그를 더욱 분노케하는 망각의 힘을 파괴시키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쫓, 나아가 그 기억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시키도록 하는데 있었다. 오대수를 자신과 같은 기억의 노예가 되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복수는 성공한다. 아니, 지나치게 승리해 버린다. 이미 고통스런 감금을 통해 기억과 복수의 괴물이 된 오대수에겐 또 하나의 기억, 그의 마지막 남은 복수에의 의지 그리고 이는 그나마 살아 남아있는 삶에의 의지이기도 한데 - 마저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기억이 부과된다. 자신의 딸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기억. 이제 오대수는 최면술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서야 살아나갈 수 있는 폐인이 되고, 철저하게 자신의 복수를 완수한 이진우는, 자신의 현재를 지탱시켜 주던 과거와 기억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