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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툼, 진리, 세계에 대한 카프카적 고찰

김남시 2005. 2. 11. 07:50

많은 경우 말다툼은 누가 옳은가를 가리는 걸 목표로 하지 않는다. 특히 그것이 연인들 혹은 가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경우엔 더욱. 난 내가 옳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내가 진리에 편에 서 있음을 속으론 확신하면서도 종종 더 이상 나의 진리내세우며 주장하지 못한다. 진리가 늘,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신자아니면 테러리스트가 되기 쉽상이다. 정작 우리의 삶은 진리의 실현에 그렇게 조바심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삶의 필연성 앞에서, 혹은 나의 진리를 받아들일 만큼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세계앞에서 자신의 진리를 잠시 접어두면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관철되지 못한 우리의 진리를 언젠가그리고 저편 Jenseits“ 으로 유예시켜 두기 때문이다.    

 

하늘은 (혹은 신은) 내가 옳았음을 알 것이다.“ 라며 죽어간 순교자들은 여기, 이 곳에서 관철되지 못한 자신의 진리를 초월적 제삼자에게 위탁함으로써 유예시킨 경우다. 그들에게 신 혹은 하늘은 자신과 세계와의 이원적 대립 속에선 언제까지나 상대적으로만 드러나는 자신 진리의 객관성을 보장해 줄 최종 판정관이다. 저 초월적 판정관은 나와 세계와의 대립을 지켜 보면서 과연 누가 옳은 주장을 하고 있는지, 누가 진리의 편에 서 있는지, 어느 편이 고집스럽게 잘못된 생각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는지 판정해 줄 것이다.

 

이는 진리는 언젠가 승리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내세우는 모든 종류의 목적론에도 해당된다. 거기엔 지금, 여기에서 관철되지 못한 진리를 시간과 역사의 초월성 속으로 유예시키는 인간의 또 다른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우린 지금, 여기에서 저 진리가 관철되지 못한 것을 아직 그럴만큼 성숙하지 못한 세계의 탓으로 돌린다. 시간의 딸인 진리는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엔 스스로 관철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지금 현재 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세계는 그 진리 앞에 무릅을 꿇을 것이다! 

 

초월적 판정관을 끌어들임으로써 좌절된 자신의 진리를 위로하려는 태도가 세계를 만든 창조주로써 이 세계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신에 대한 신학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면, 진리는 언젠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이 세계의 진리는 그 종말의 순간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는 목적론적, 종말론적 역사관에 뿌리박고 있다. 저 종말의 시간은 윤리적인 심판의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 모든 것들의 '의미와 진리'가 비로소 분명해지는 진리 심판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세계의 비 진리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초월적 창조주도, 현재의 비진리를 참을 수 있게 만들던 저 종말의 시간에 대한 믿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사람들은 도대체 이 현재 세계의 비진리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나갈까? 우린 그를 카프카가 그려내는 세계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에겐 현재 자신들이 사는 세계의 비진리를, 그 속에서 자신들이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할부당함을 보상받게 해 줄 초월적 시간과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체포영장을 받은 엠은 언젠가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법이라는 성문 앞에서, 언젠가 문지기가 자신을 들여보내주리라고 믿던 주인공은 끝내 기다리다 늙어 죽어버린다. 자신이 예정된 기간보다 더 오래 단식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던 단식사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채 굶어 죽는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날 아침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리는 언젠가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리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가 썩어 개처럼죽어버린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너무도 싫어하는 작은 여인으로 인해 고민하는 주인공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 싶어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포기한다.  

 

이들의 세계엔 세계의 비진리와 갈등을 일으킨 이들의 삶 하나 하나를 지켜보고 판정해줄 신도, 언젠가 이들의 진실을 온 세상에 알리게 해 줄 목적론적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혹은 세계는 그들의 삶의 사소한 일들까지 신경을 쓸만한 시간이 없으며“, 이들의 삶은 그에대한 어떤 초월적 판정도 불가능한 지금, 현재의 이 세계속에서만 일어난다. 이들의 세계엔,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우세한 듯 보이던 악을 물리치고 결국 멋지게 개선하는 정의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이, 진리가, 정의가, 지금 당장, 바로 이곳에서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승리하고야 만다는 믿음은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삶과 사건과 일들을 모두 찬찬히 지켜보며 판정하고 있는, 이 세계를 벗어나 있는, 그리하여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세계에선 그리하여,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갈등과 오해와 착오와 비진리가 사람들의 팍팍한 삶을 힘들고 짜증나게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그것이 해소되고, 해명되며, 해결될 것이라는 어떠한 기대도 가질 수 없다. 그곳에서 세상의 비 진리와 착오와 오해와 갈등은 결국엔 해결되고 해명됨으로써 우리의 목적론적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는 갈증해소용 음료수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그 속에서 함께 살다가 개처럼죽어갈 이 세계와 우리 삶의 근본 요소들이다. 이 세계는 자신의 비진리에 대해, 우리만큼, 그렇게 괴로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