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잠투정하는 아이 2003.7.29

김남시 2005. 10. 30. 04:54
우노는 잠 투정이 많다. 잘 웃고 떠들던 녀석이 졸리기 시작하면 징징거리고 보채기 시작한다. 침대에 갖다 누이면 더 크게 울어대며 투정한다. 왜 아이들은 잠투정을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졸음이라는 생리적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졸리면 자면 될텐데 말이다.

깨어서, 무언가 흥미롭고 재미롭던 일들을 더 하고 싶은데, 졸음이 와서 하지 못하게 된 데서 오는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그것을 방해하는 졸음이라는 생리적 작용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감지하고, 그로부터 정신적 갈등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이는 어쩌면 ‚졸음‘이라는 생리적 반응을 어떤 ‚고통‘같은 것으로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멀쩡하게 놀고 있던 중에 찾아오는 졸음은 마치 몸의 어떤 부위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칭얼대기 시작한다. 그 고통이 더이상 그것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잠의 상태로 변화하기 전까지 아이는 그 고통을 계속적인 칭얼댐과 울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졸음이라는 생리적 신호를 잠이라는 육체의 특정한 국면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킬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졸리다. 이제 잠을 자야지‘라는, 우리에겐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일상적 과정 속에는 사실상 ‚잠을 잔다‘고 하는 행위를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육체의 국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졸음이라는 생리적 상태를 잠이라는 육체적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린 우리의 의지를 통해 졸음을 견디며 참을 수도, 혹은 이를 편안한 잠으로 이끌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 잠은 우리에게 그러하듯 자명하고 어쩔수 없는 우리 육체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져 있지 않다. 프로이드가 말했듯 잠은 육체의 모든 감각 활동들이 잠시 그 활성을 중단하는 일종의 ‚죽음‘의 상태에 다름 아니다. 아이는 그러한 육체의 소강상태를 아직 육체를 가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고통처럼 다가오는 저 잠의 상태를 거부하고, 마치 우리가 죽음을 거부하고 회피하듯이,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난 아이가 마치 새로 태어난 듯 다사로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