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아버지의 무전기 2003.7.23

김남시 2005. 10. 30. 04:54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어쨋든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난 여느때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한 밤중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다가 아버지가 밤늦게 귀가하시는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아마 새벽 두 세시가 지난 시각이 아니었을까.

불콰한 얼굴과 술냄새를 풍기며 아버지는 내 방에 들어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잠자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아빠가 무전기 사왔어.

당시 TV에선 '엘에이 형사 기동대'인가 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그들은 범인을 추적하면서 멋지게 '무전기'를 들고 다녔다.

아버지가 사오신건 9 볼트짜리 네모난 건전지 - 위쪽에 튀어나와있는 두개의 극선에 혓바닥을 갖다대면 짜릿한 감전을 느낄수 있는 - 로 작동되는 '진짜 무전기' 였다. 종이컵 끝에 무명실이 매달린 가짜 무전기와는 차원이 다른!

한 밤중에 난데없이 잠에서 깨인 나는 그러나, 무전기를 사들고 오면서 아버지가 기대했었을 만큼의 기쁜 환호를 보여주지 못했다. 졸리운 눈을 비비며 술취한 아버지와 치칙 거리는 무전기로 몇마디 대화를 나누어 주곤 곧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당시 우리의 형편으로선 매우 비쌌음에 틀림없었을 그 무전기를 도로 품에 받아 안으며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지 난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작은 사건이 그의 마음에 어떤 실망을 남겨놓았을지도.

그로부터 20 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난 내 딸 아이의 장난감을 산다. 그를 받고 기뻐할 녀석의 모습만 떠올리면서 우리 형편엔 만만치 않은 가격을 치르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 걸음은 바빠지기만 한다.

만일 녀석이 이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난 20년 전, 무전기를 사들고 집으로 오는 아버지가 내 속에서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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