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입술로 ‚빠빨빨빠’ 소리를 내고 있다. 난 녀석이 ‚노래부르며 춤을 추고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이에게 묻는다.
‚가은아, 뭐해?. 그러나, 녀석은 내가 „뭐해“라는 말을 통해 의도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 서 있다. „응 빠빨빨빠 해“.
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을 본다’는 말이 떠올랐다. 또한 비트겐스타인이 철학 탐구에서 행했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과 숙고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아이에게 „이게 토끼야“라고 토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을 때, 아이는 나의 그 행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어쩌면 녀석은 내가 가리킨 토끼 그림대신 내 손가락의 모양, 곧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위해 취한 특정한 내 손가락의 형태를 ‚토끼’라고 부른다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녀석은 내가 ‚이게 토끼야’라고 말하며 가리킨 토끼 그림에서 우연히 내 손가락이 짚고 있었던 토끼의 귀만을 보고 그것을 ‚토끼’라고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는 „이게 토끼야“라는 문장 전체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토끼 그림의 ‚이름’이라고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이.게.토.끼.야“라는 다섯음절의 내 딴에는 ‚문장’이 아이에겐 마치 ‚종이 비행기’라는 다섯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로 이해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난 아이에게 ‚빨간색’을 가리치기 위해 빨간색 공을 집어 아이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가은아 이게 빨간색’, 다음엔 파란색 공을 보여주며 ‚이게 파란색이야’라고.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오해의 여지가 없지않다. 아이는 공의 색깔이 아니라 그 공 자체를 ‚빨간색’ 혹은 ‚파란색’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장 기초적인 말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물건과 그 이름을 직접 그 사물을 가리킴으로써 연결시켜주는 행위가 사실은 기초적이기는 커녕 매우 복잡한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겨우 이해될수 있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녀석은 이 사실을 내게 깨닫게 해준다.
내가 녀석에게 ‚가은아, 뭐해?“라고 물었을 때, 난 이미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 사건 혹은 인간의 행위를 특정한 척도에 따라 서로 구분하는 기준을 적용한 것이었다. 난 ‚둥글고 작은 물체를 발로 굴리거나 차면서, 서로 마주 서있는 그물망에 차 넣으려고 용쓰는 행동’을 전체적으로 „축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몸을 좌우 혹은 위 아래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입으로 무엇인가를 흥얼거리는 행위“를 대체로 ‚춤을 춘다’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있었다.
또한 나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이게 책상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넓은 판과 세게 혹은 네개 이상의 다리로 이루어진 물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의 색깔이나 판자의 모양 (4각형이냐 5각형이냐), 아니면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책상’이라고 부르는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미 나는 말의 규칙과 사용법을 익혀 알고 있어야만 한다. 만일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하여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마다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분하는 서로 다른 나름대로의 척도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언어적 의사 소통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말을 막 배워가고 있는 아이는, 그 말과 더불어 세계를 보는 - 메타포적 의미가 아니라 말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 - 방법을 배워갈 것이다.
아이는 내 언어철학적 성찰의 훌륭한 실험실이자 후원자다.
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을 본다’는 말이 떠올랐다. 또한 비트겐스타인이 철학 탐구에서 행했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생각났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과 숙고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아이에게 „이게 토끼야“라고 토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을 때, 아이는 나의 그 행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어쩌면 녀석은 내가 가리킨 토끼 그림대신 내 손가락의 모양, 곧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위해 취한 특정한 내 손가락의 형태를 ‚토끼’라고 부른다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녀석은 내가 ‚이게 토끼야’라고 말하며 가리킨 토끼 그림에서 우연히 내 손가락이 짚고 있었던 토끼의 귀만을 보고 그것을 ‚토끼’라고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는 „이게 토끼야“라는 문장 전체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토끼 그림의 ‚이름’이라고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이.게.토.끼.야“라는 다섯음절의 내 딴에는 ‚문장’이 아이에겐 마치 ‚종이 비행기’라는 다섯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로 이해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난 아이에게 ‚빨간색’을 가리치기 위해 빨간색 공을 집어 아이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가은아 이게 빨간색’, 다음엔 파란색 공을 보여주며 ‚이게 파란색이야’라고.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오해의 여지가 없지않다. 아이는 공의 색깔이 아니라 그 공 자체를 ‚빨간색’ 혹은 ‚파란색’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장 기초적인 말을 배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물건과 그 이름을 직접 그 사물을 가리킴으로써 연결시켜주는 행위가 사실은 기초적이기는 커녕 매우 복잡한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겨우 이해될수 있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녀석은 이 사실을 내게 깨닫게 해준다.
내가 녀석에게 ‚가은아, 뭐해?“라고 물었을 때, 난 이미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 사건 혹은 인간의 행위를 특정한 척도에 따라 서로 구분하는 기준을 적용한 것이었다. 난 ‚둥글고 작은 물체를 발로 굴리거나 차면서, 서로 마주 서있는 그물망에 차 넣으려고 용쓰는 행동’을 전체적으로 „축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몸을 좌우 혹은 위 아래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입으로 무엇인가를 흥얼거리는 행위“를 대체로 ‚춤을 춘다’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있었다.
또한 나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이게 책상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넓은 판과 세게 혹은 네개 이상의 다리로 이루어진 물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의 색깔이나 판자의 모양 (4각형이냐 5각형이냐), 아니면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책상’이라고 부르는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미 나는 말의 규칙과 사용법을 익혀 알고 있어야만 한다. 만일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하여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마다 한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분하는 서로 다른 나름대로의 척도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언어적 의사 소통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말을 막 배워가고 있는 아이는, 그 말과 더불어 세계를 보는 - 메타포적 의미가 아니라 말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 - 방법을 배워갈 것이다.
아이는 내 언어철학적 성찰의 훌륭한 실험실이자 후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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