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dergarten

아이의 노동력 2002.8.20

김남시 2005. 10. 30. 04:47
엄지와 검지,약지를 합한 크기만한 주먹으로 녀석이 엄마, 아빠의 어깨를 두드려 줄줄 알게되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통통통통 어깨를 두르리는게 나름대로 꽤 시원하다. 우린,녀석을 힘들게 키운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 한다. 녀석의 성장을 위해 소비된 엄마,아빠의 에너지가 녀석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통해 재충전되는 듯 하다.

사실 녀석은 그밖의 많은 일들을 할 줄 알게되었다. 엄마, 아빠가 힘들어 보이면, 쪼르르 달려와 안마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거 휴지통에 갖다버려. 이 양말 엄마한테 갖다줘. 부엌에 가서 물 좀 가져와. 등의 심부름까지 할 수 있다.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흐뭇함은 단지,귀찮은 작은 일 하나를 덜게되었다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무언가 스스로 에너지를 발산하며,움직이고,일을 하는 작은 생명체를 우리가 "만들어 내었다"고 하는 창조의 기쁨같은 것이 있다. (스스로 노동하고, 개간하며, 종족을 번식하면서 살아나가는 피조물을 보고 창조주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말하자면, 녀석은 지금껏 받아먹고,자며 우리의 에너지를 소비하기만 하던 존재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일할 수 있는, 말하자면 노동력을 갖춘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를 만들어내는 것의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성장한 아이가 발휘할 수 있는 노동력은 아이 키우기가 무언가 남는 장사(?)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의 가난한 조부들이 아이 만들기를 일생의 투자로 생각했었던 데는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논법에 의하면, 커서 집안 일을 도와줄 뿐 아니라, 나중엔 부모 대신 돈을 벌어다 주기도 하는 아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였다.

지금 내 어깨를 두들겨 주는 아이의 육체적 에너지와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자본주의적 노동력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난 우리 아이가 지금 내게 베푸는 인간적 노동 - 맑스가 경철 초고에서 말한 바, 그를 통해 자기자신을 실현시키는 (아이의 경우는 기분 좋아진 부모에게서 사탕이나 초코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상승을 의미하겠지만) - 이 하루 빨리, 높은 임금으로 교환되는 비싼 노동력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보다 더 잘 키우고, 잘 가르치려는 것이 결국은 비싸게 팔리는 노동력을 위해 애써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녀석의 자라난 손이 아빠의 어깨가 아닌,키보드나 전화기를 두드릴때도 녀석은 지금처럼 즐겁고, 의기양양 할 수 있을까? 그의 노동이 지금 내가 느끼는 기쁨처럼,사람들에게 노동을 통한 '창조의 기쁨'을 전해줄 수 있을까? 아빠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이의 노동이 이 세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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