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시로 이사오고 나서 우리가 제일먼저 착수한 것은 아이의 유치원을 찾는 일이었다. 약 7개월여 동안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 선생님을
떠나오면서 아이에게는 새로운 도시에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처음부터 다시 적응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부여되었던 셈이다.
다행이도 집 근처의 유치원에 자리를 얻었다. 아이가 다닐 새 유치원은 베를린의 바닥난 재정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듯 구 동독시절의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아이가 유치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을때 난 복잡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우리를 위해 아이에게 익숙했던 환경을 박탈하고 새로운 낯선, 그것도 그리 쾌적하지 못한 곳에의 적응을 강요하고 있는 부모로서의 자책감이 거기엔 자리잡고 있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혼자', 자기와는 전혀 다른 말을 쓰는 저 낯선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버텨내도록 아이를 몰아대고 있는 나는?
안쓰러워 보이는 아이를 위해 주말이면 되도록 아이와 함께 놀아주려고 애쓴다. 베를린 동물원에 가서 녀석이 좋아하는 코끼리와 원숭이, 사자와 팬더를 보고, 그 옆 수족관에 서는 악어와 뱀,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들을 보고 왔다. 아이는 아이들이 만져볼수 있게 해놓은 어항속에 손을 넣고 붉은 빛의 잉어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걸 보고 즐거워했다.
저녁 먹고 녀석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이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이는 산책만 나가면 거리를 방방 뛰어다니며 길거리에 난 꽃을 따 들고 다니다가,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타기도 한다. 거리 카페에서 파는 작은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얼굴과 온 몸에 묻혀가면서 정신없이 빨아먹는다.
우리가 아이에게 갖는 미안함 혹은 자책감은 아이의 미래가 완전히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는데 있다. 내가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놀아준다면, 좀 더 많은 장난감을 아이를 위해 사 준다면, 좀 더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면 아이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 늘 미래에의 가능성에 열려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부담과 무게로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바로 이때다.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이 부모의 유한한 능력과 시간,재산에 의해 '제한'된다고 생각될 때, 부모의 한계가 그를통해 아이의 한계로 대물림된다고 여겨질 때 우리에게 날아드는 좌절감...
그러나, 만일 저 개인의 한계가 곧 아이의 한계로 유전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진다면? 부모의 능력과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조건 속에서 동등하게 최대한의 가능성을 사회로부터 제공받는다면?
그러기 위해선 우선 '아이의 교육'이 전적으로 개별 부모들의 책임으로 맡겨져있는, 그리고 그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교육'적 분위기가 '공교육'의 활성화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거다.
다행이도 집 근처의 유치원에 자리를 얻었다. 아이가 다닐 새 유치원은 베를린의 바닥난 재정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듯 구 동독시절의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아이가 유치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을때 난 복잡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우리를 위해 아이에게 익숙했던 환경을 박탈하고 새로운 낯선, 그것도 그리 쾌적하지 못한 곳에의 적응을 강요하고 있는 부모로서의 자책감이 거기엔 자리잡고 있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혼자', 자기와는 전혀 다른 말을 쓰는 저 낯선 사람들과 환경 속에서 버텨내도록 아이를 몰아대고 있는 나는?
안쓰러워 보이는 아이를 위해 주말이면 되도록 아이와 함께 놀아주려고 애쓴다. 베를린 동물원에 가서 녀석이 좋아하는 코끼리와 원숭이, 사자와 팬더를 보고, 그 옆 수족관에 서는 악어와 뱀,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들을 보고 왔다. 아이는 아이들이 만져볼수 있게 해놓은 어항속에 손을 넣고 붉은 빛의 잉어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걸 보고 즐거워했다.
저녁 먹고 녀석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이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이는 산책만 나가면 거리를 방방 뛰어다니며 길거리에 난 꽃을 따 들고 다니다가,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타기도 한다. 거리 카페에서 파는 작은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얼굴과 온 몸에 묻혀가면서 정신없이 빨아먹는다.
우리가 아이에게 갖는 미안함 혹은 자책감은 아이의 미래가 완전히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는데 있다. 내가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놀아준다면, 좀 더 많은 장난감을 아이를 위해 사 준다면, 좀 더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준다면 아이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 늘 미래에의 가능성에 열려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부담과 무게로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바로 이때다.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이 부모의 유한한 능력과 시간,재산에 의해 '제한'된다고 생각될 때, 부모의 한계가 그를통해 아이의 한계로 대물림된다고 여겨질 때 우리에게 날아드는 좌절감...
그러나, 만일 저 개인의 한계가 곧 아이의 한계로 유전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진다면? 부모의 능력과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조건 속에서 동등하게 최대한의 가능성을 사회로부터 제공받는다면?
그러기 위해선 우선 '아이의 교육'이 전적으로 개별 부모들의 책임으로 맡겨져있는, 그리고 그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교육'적 분위기가 '공교육'의 활성화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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