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아 발 어딨어? 하면 녀석은 왼쪽 혹은 오른쪽 발을 들어올리며 '바'한다. 손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가리키며 응답. 그럼 입은? 입술
혹은 이빨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아이는 자신에게 '발'이 달려있는지, 자신이 지금 눈으로 보고 가리키는 것이 정말 확실한 발인지, 혹시 환영이나 환상을 보고있는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이 '발'이라 불리는 대상이란 사실을 그 말과 함께 배웠고 그를 믿는다.
아이는 소위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통해 설득당한 것도, '발'과 그 지칭대상사이의 필연적 연관관계에 대한 언어학적 숙고도, 소위 발에 대한 본질론적 물음들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린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그것이 '발'이라 불린다고 배웠고 그를 믿을 뿐이다.
확신컨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에게 발이 달려있으며, 그를 발이라 부른다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발이 존재한다고 하는 확립된 사실로부터 그 발로 걸어가며, 공을 차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발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더 배워나갈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발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면, 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발을 들어 흔들어 보이면서 '여기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트겐스타인이 열거한 예에서처럼, 그는 나중에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머리 속엔 '뇌'가 들어있다고 선생과 교과서, 그리고 이성적인 모든 사람들의 수긍을 통해 배울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에대해서도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뇌가 있다는 확립된 사실로부터 누군가가 뇌에 출혈을 일으켰다거나, 뇌에 종양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의심한 바, 감각의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진실로 참된 것으로 여겨지게 했던 것들이 때때로 우리를 기만한다는 사실. 내가 여기 벽난로 앞에 앉아, 겨울외투를 입고, 손에 종이를 들고있다는 일견 자명해 보이는 사실에 대한 의심은, 그러나 그가 잠시 저 언어게임에의 참여를 '유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말을 배워가면서,그 말이 통용되는 언어게임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의 존재를 '그저 믿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믿어 받아들인 지식의 체계는 그 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될 것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발'이 달려있는지, 자신이 지금 눈으로 보고 가리키는 것이 정말 확실한 발인지, 혹시 환영이나 환상을 보고있는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이 '발'이라 불리는 대상이란 사실을 그 말과 함께 배웠고 그를 믿는다.
아이는 소위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통해 설득당한 것도, '발'과 그 지칭대상사이의 필연적 연관관계에 대한 언어학적 숙고도, 소위 발에 대한 본질론적 물음들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린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그것이 '발'이라 불린다고 배웠고 그를 믿을 뿐이다.
확신컨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에게 발이 달려있으며, 그를 발이라 부른다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발이 존재한다고 하는 확립된 사실로부터 그 발로 걸어가며, 공을 차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발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더 배워나갈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발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면, 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발을 들어 흔들어 보이면서 '여기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트겐스타인이 열거한 예에서처럼, 그는 나중에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머리 속엔 '뇌'가 들어있다고 선생과 교과서, 그리고 이성적인 모든 사람들의 수긍을 통해 배울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에대해서도 추호의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뇌가 있다는 확립된 사실로부터 누군가가 뇌에 출혈을 일으켰다거나, 뇌에 종양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의심한 바, 감각의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진실로 참된 것으로 여겨지게 했던 것들이 때때로 우리를 기만한다는 사실. 내가 여기 벽난로 앞에 앉아, 겨울외투를 입고, 손에 종이를 들고있다는 일견 자명해 보이는 사실에 대한 의심은, 그러나 그가 잠시 저 언어게임에의 참여를 '유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말을 배워가면서,그 말이 통용되는 언어게임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의 존재를 '그저 믿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믿어 받아들인 지식의 체계는 그 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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