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플라톤과 국가주의

김남시 2000. 1. 11. 16:12

예술 특히, 감정적, 비이성적 원리에 의해 제작, 향수된다고 여겨졌던 시에 대한 플라톤의 검열의 논리 속에서 가장 우려할만한 것은 그의 전체주의적 국가관과 관련되어 있는 지점이다. (정치, 사회의 영역에서 이것은 Karl Popper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을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신랄하게 비판했던 점이다.) 서두(플라톤 컬럼 1호)에서 밝힌바 있듯이, 플라톤의 철학 사상은 정치적 이념을 실현시키고 싶어하던 그의 기획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국가는 그의 철학적, 정치적 신념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그리하여, 이성적 지배자와 비이성적 민중이라는 국가의 외적 질서는 또한 인간 내면- 감정과 이성 - 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가 이념의 객관적 실현단위라고 한다면, 인간 내면은 그것이 완결되는 이념의 주관적 실현단위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를 '절제'라는 덕목을 통해 도입하고 있는데, "절제란 일종의 질서이며 또 어떤 쾌락이나 욕망의 극복(Republic 430e)"으로써, 이는 개개인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일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의 국가에서 유지되어야 할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영혼에는 [이성적 부분]과 사랑하거나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하는 작용을 하는 '비이성적 부분'이 있다. 개개인에게 있어 '이성적 부분'은 '비이성적 부분'을 지배하고 복종시켜야 하듯이, 국가에서도 지배하고 지배받는 부분들이 서로 일치되어 이성적 부분은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고, 다른 부분은 그 부분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Republic 442 d)

지배받는 민중이 이성적 통치자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되듯이, 규제되지 않은 시나 음악이 불러일으킬 정염과 쾌락은 이성적 규제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며, 이것이 절제이자 정의이다. 뒤집어 말하면, 절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무질서는 곧, 국가의 무질서로서의 불의로 이어지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불의'란 <국가 내에선>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싸움이고, <인간 내면에 있어선> 영혼의 한 부분이 그 전체에 대항하여 자기에게 걸맞지도 않으면서 영혼의 지배자가 되려고 일으킨 배반"(ibd, 444b)이다. 따라서, '불의'와 '정의'는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다름없다...건강하게 한다는 것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을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자연스런 관계로 세워놓는 것이지만, 병들게 한다는 것은 이 자연스런 관계를 어겨서 하나가 지배하거나 다른 것의 지배를 받거나 하게되는 일"(ibd. 444 d)이다. 여기서 지배하는 것은 이성적 통치자와 그를 대변하는 이성적 규제이며, 지배받는 것은 비이성적 민중과 쾌락, 감정과 욕망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문제를 삼는 것은 플라톤이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가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념의 역사성과 오늘날 현실에의 적실성에 대한 반성없이 그의 논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검열주의자'들의 논리이다. 규제되지 않은 예술 문화가 사회의 기강과 국가의 질서를 흔들리게 한다고 믿는 오늘날의 검열 주창자들의 논리 속에 혹시 옛 플라톤 시대에 꿈꾸었던 '이상적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기획이 숨어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이성적 지배자임을 자처하며, 비이성적 민중들과 그들을 유혹하여 타락에 빠뜨릴지도 모를 예술 문화들을 지배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절제'와 규제를 배워야하는 비이성적 민중들과 그들에게 문화예술의 규범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를 규제하는 이성적 지배자의 구도를 오늘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 또하나의 논점. 한국 사회에서 검열의 논리 속엔 또하나 깊은 뿌리를 가진 유교적 국가주의의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훈육과 규율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하고 개인의 인성과 국가의 통치 이념을 전일적으로 사고하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저 플라톤적 규제논리와 결합하여 오늘날 검열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