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무한한 물건, 무한한 세계

김남시 2003. 1. 25. 23:45
이 세상에는 내가 평생동안 읽어도 다 읽지못할 책이 있으며, 내가 평생동안 해보아도 다 하지 못할 게임들이 있으며, 내가 평생동안 보아도 다 보지 못할 영화가 있고, 내가 평생동안 모아도 다 모으지 못할 우표와 동전이 있으며, 내가 평생동안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음악들이 있다. 또한 이 세상에는 내가 평생동안 마셔도 다 마시지 못할 맥주가 있고, 내가 평생동안 입어도 다 입지못할 옷들과, 내가 평생동안 신어도 다 신지못할 신발들이 있고, 내가 평생동안 타 보아도 다 타지 못할 자동차들이 있다. 이 세상엔 내가 평생동안 씹어도 다 씹지 못할 껌이 있고, 내가 평생동안 피워도 다 피우지 못할 담배와 내가 평생동안 써도 다 쓰지 못할 노트와 볼펜들이 있다...

칸트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한계 속에서 시,공간의 무한성을 도출해 내듯, 우린 우리 존재의 전부인 평생을 걸어도 다 소비하지 못할 이 세계의 물건 들에서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세계의 무한성을 느낀다. 칸트가 그리고 유럽의 철학자들이 그러한 세계의 무한함으로부터 무한한 신의 능력과 은혜에 감격했다면, 평생을 벌어도 다 소유하지 못할 이 무한한 물건들의 거대함 앞에서 소외와 좌절, 피해의식과 자책의 상처를 받는다. 전 지구화된 물건의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는 물건과 상품들로 가득찬 이 세계는 나의 전 존재를 투여해도 그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못할 거대하고 사나운 괴물에 다름 아니다.

아직 세계가 저 지칠질 모르는 “물건의 괴물”을 탄생시키기 이전, 사람들은 거대한 야심과 자신만만한 의욕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거머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세계의 모든 지식을 자신의 백과사전에 담으려 했던 디드로와 세계의 모든 식물의 분류체계를 발견했다고 믿은 린네, 세계의 모든 유물을 수집하려 했던 나폴레옹과 세계의 모든 정신을 자신의 철학 속에서 종합하려 했던 헤겔....

어쩌면 몇십배, 아니 몇백배나 커져버린 저 세계라는 괴물 앞에서, 평생을 벌어야 겨우 자신과 가족을 누일 집 한채를 마련할 한국의 샐러리맨들은, 무이자 할부 판매로 장만할 자동차와 아이를 위한 컴퓨터 한대를 위해 오늘도 자신의 삶을 소비시키고 있다.


'물건과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국영의 죽음과 변화된 세상  (0) 2003.06.04
전봇대와 단절의 역사  (0) 2003.05.21
플라톤과 국가주의  (0) 2000.01.11
플라톤과 음악  (0) 2000.01.07
예술에 대한 최초의 경계경보 : 플라톤 1  (0) 2000.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