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전봇대와 단절의 역사

김남시 2003. 5. 21. 06:26

 

여유롭게 님의 전보대 사이트 http://withyou.giveu.net/에서예전에 살았던 집 동네엔 유난히 전봇대가 많았다. 좁은 1차선 도로에 연이어 있는, 길이가 10미터도 안되는 골목에만도 내 기억으로 네 개의 전봇대가 세워져 있었다. 반지하까지 합해 3층 양옥집이었던 우리 집 옥상에 불법으로 개조해 만들었던 내 방에선 그 전봇대에서 뻗어나온 시커먼 전기줄들이, 교회의 붉은 십자가들과 함께 어지럽게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옥상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던 전봇대엔 그외에도 철재 덮개를 한 백열등이 마치 가로등인 양 매달려있기도 했다.

앞집 '쌍둥이네'가 헐려 주유소로 변하고, 건너편 '장군집' - 그 집 아저씨가 5공 때 육군 소장이었다. 그래서 우리집 앞 골목엔 늘 별판을 단 찝차가 서있곤 했다. - 이 5층짜리 연립주택으로 변해가는 동안 그 전봇대들엔 이전보다 더 많은 전기줄이 연결되고 뻗어나와 새로 지은 건물들로 이어졌다. 덕분에 전봇대와 건물들 사이에 공간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뻗어나간 전기줄들로 거의 채워져 버려, 누군가 우리집 옥상에서 투신하려 해도 그 전기줄들에 걸려 땅에 닿기도 전에 감전되어 죽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노란색 백열등을 매달고 골목의 가로등 역할을 겸하던 그 전봇대는 알고보 면 그외에도 매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었다. 여유롭게 님의 전보대 사이트 http://withyou.giveu.net/에서밤늦게 술취해 귀가하는 아저씨들에게 그 전봇대들은 '참을 수 없는 방광의 무거움'을 해소시켜 주는 든든한 차폐물이었고, 그들의 오줌자국으로 얼룩진 전봇대 밑둥엔 동네를 돌아다니던 떠돌이 개들이 또다시 자신의 영역을 과시하기 위한 후각적 (그리고 시각적인) 신호를 새겨두곤 하였다. 밀회의 장소를 갖지 못한 열뜬 연인들에게 전봇대는 서로의 육체를 탐색하기 위한 '등 받침대'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난 내 방 창가에서 전봇대에 기대 벌이던 그들의 '이상한 짓거리를' 훔쳐보곤 했었다. ) 골목의 양편에 떨어져 서 있는 전봇대 두 개는 골목 축구의 골대가 되기에 충분했으며, 그리 두껍지 않은 전봇대에 야구공을 던져 맞추며 아이들은 자신의 정확한 투구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다. 대범함을 통해 튀어보려던 몇몇 녀석들은 양손과 옷에 허연 먼지를 뭍혀가며 전봇대를 기어 올라가는 불안한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 전봇대는 이제 막 면허를 딴 초보 운전자들에겐 골목주차의 끔찍한 악몽을 상기시켜 주는 방해물이기도 했다. 전후 왕복을 거듭하던 차들이 앞 뒤로 서 있는 전봇대에 막혀 범퍼를 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telegraphenmast이렇듯 우리 삶의 공간 곳곳에 박혀 있었던 '전봇대'라는 명칭이 사실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난 얼마전에야 깨닫게되었다. 1837년 미국의 모르스가 텔레그라프를 발명한 이래 '전보-대' 혹은 '전신-주'는 전기신호를 통해 '소식'을 전달하는 전선을 떠받치던 '기둥' 이었다. 전기가 보편화되기 이전 전기 보다 먼저 상용화되었던 유선 '전보 혹은 전신' 기술은 멀리 떨어진 지역 사이에 즉각적인 소식 전달을 가능케 했던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선 각 지역들의 전보 혹은 전신소를 연결하는 긴 전선이 필요했으며,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공중으로 올라간 그 전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 곧, '전봇대'나 '전신주'가 지탱해주고 있었다. 20세기 이후의 발명품인 무선 통신이 유선 통신을 대체하면서 사실상 이러한 의미의 전보나 전신을 전달하기 위한 '전봇대'는 오늘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독일어나 영어에서는 전보나 전신을 위한 기둥을 Telegrafen/Mast, 전기공급을 위한 기둥을 Leitungs/Mast라고 씀으로써 이 둘을 구별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이전 시대의 '전봇대' 혹은 '전신주'라는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봇대 혹은 전신주'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은 '전기를 전달하는 케이블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우린 이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그 단어를 전혀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데 계속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마치 원래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차량을 지칭하는 단어였던 '기차' 라는 단어를 오늘날에도 그냥 사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전 시대 유선 통신을 위한 전봇대나 전신주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를 따라 가설되어 있었다. 멀리 떨어진 지역들의 통신국을 연결해야 하는 전보 케이블은 두 지역을 연결시켜주던 철로를 따라 설치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엔 각 기차역들은 그런 전보 통신국을 겸하기도 했다. 떨어져있는 두 공간을 물리적으로 이어주는 철로와 전기적 신호를 통해 그 두 공간 사이를 가상적으로 연결시켜 주던 유선 통신은 이렇게 서로의 의미를 교차시키고 있었다.(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일본 감독의 영화 '철도원'은 철도와 기차역, 역장이 갖고있는 이러한 의미망 속에서 움직인다. 그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소식을 전하며, 만나게 해 준다. 나아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 두 명의 등장인물 사이에서 화면을 이등분하며 자주 등장하는 전봇대는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단절감을 표현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다. 여기에선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기 위한 통신수단이었던 전봇대가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단절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전된다!)

내가 살았던 동네의 전봇대를 생각하다가 문득, 지금 내가 살고있는 도시 베를린의 전봇대에 대해선 지금까지 한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곤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는 길에 뒤늦게 전봇대를 찾아 보았다. 그리곤 놀랍게도 이 동네의 거리에선 전봇대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후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혹은 우연히 지나가게 되는 길가에서 몇번이고 확인하며 둘러보았지만 베를린에선, 전차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전선들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있을 뿐, 한국에서 보았던 그 어떤 형태의 '전봇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베를린 근교를 기차를 타고 돌아가다 보면 사람이 살지않는 산이나 들판에 세워진 거대한 '고압선 철제 기둥' 들을 접할 수는 있지만, 서울의 도심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거지역의 전기공급을 위한 전봇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곳에서 전기는 모두 땅속에 묻힌 케이블을 통해 각 가정으로 공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봇대는 단기적으로 그리고 급속하게 만들어진 외재적 도시들의 전형적 풍경 중 하나다. 산동네의 판자촌이나 급조된 주거 지역들엔 임시로 지어진 합판 집과 함께 어지럽게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전봇대가 혼란스럽게 서 있다. 그건 마치 치료하고 봉합하여야 할 상처에 응급조치로 덮여있는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이다. 그 상처는 상처를 덮은 휴지조각과 함께 흉한 흉터를 남기며 아물어 버렸다. 유럽의 도시들은 그들 삶의 역사로부터 자신 도시의 모습을 차곡 차곡 하나 하나 만들어왔다. 오늘날 이들 도시의 안정되고 깔끔한 모습은 이들이 누릴 수 있었던 단절되지 않은 역사의 일관된 연속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운터덴 린덴의 가로등1826년 베를린 운터 덴 린덴에 최초로 '가스등'이 개설되었다. 이웃 런던에선 이미 1807년 부터 사용되고 있던 가스등이 뒤늦게 들어온 것이었다. 석탄을 태워 발생하는 가스를 연소시킴으로써 밝은 빛을 발생시키는 가스등은 19세기 유럽의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이를통해 공장은 밤늦게까지 더 많은 시간을 가동시킬 수 있었고, 이렇게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오랜 시간을 밤거리에서 즐길수 있게 되었다. 가스등이 유럽 도시들에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이를통해 '조명'에 대한 중앙 집중적 관리가 도입되었다는 데에 있다. 가스등이 개발되기 전 유럽의 거리를 밝히던 기름등은 각각의 등이 일정분의 기름을 담고 있어야 했던데 반해, 가스등은 도시 외곽에 건설된 '가스 생산소'로 부터 땅 밑에 묻힌 가스관을 통해 가스를 공급 받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가스등이 설치된 곳과 가스 생산소를 이어주는 지하 가스관 개설이 필수적이었다. 1888년 베를린에서 가스등이 전기로 작동하는 전기등으로 교체될 때 이들은 굳이 땅을 파내 다시 전선을 묻는 대대적 토목 작업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사용하고 있던 가스관의 연결망을 전선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전기가 상용화되어 일반 가정까지 전기를 공급해야 했던 과제 역시 이들은 이미 땅 속에 가설되어 있었던 가스 공급망을 전선과 케이블로 교체하는 간단한 작업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유럽의 도시들이 횃불에서 기름등, 가스등에서 전기등이라는 내재적 발전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을 때, 우린 우리의 삶의 방식과 형태에 맞는 '조명'의 역사를 숙성시켰어야 했다. 20세기 어느날 아침 폭력적으로 맞이한 외재적 개화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나 우리는 유럽인들의 역사적 결과물을 '문명의 소산'으로 떠안고 흡수해야만 하는 후진 문명국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서구에선 이미 상용되고 있던 전기를 수용하기 위해 이미 서 있던 건물 아래의 땅을 파고 집집마다 이어지는 케이블을 묻을 만한 시간과 여유가 우리에겐 없었다. 유럽의 도시들이 오랜 시간의 역사를 통해 이뤄왔던 기초 작업을 건너뛴 채 우린 하루라도 빨리 '전기'를 가설하고 이를 사용하는 '문명화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때까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이들 '선진문명'을 위해 준비시킬 여유조차 우린 갖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저 전봇대와 그들을 잇고있는 어지러운 검은 전기줄 들이다.

 전기 케이블이 깔끔하게 땅 속에 묻혀있는, 말 그대로 '토여유롭게 님의 전보대 사이트 http://withyou.giveu.net/에서착화'된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전봇대에 걸쳐져 어지럽게 공중에 매달린 전선들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그 삶의 역사로부터 자라나오지 않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급히 받아들여야 했던 '서구 문명'과 우리 사이의 이질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도심 곳곳에 서 있는 전봇대와 거기에 어지럽게 묶인 전선들은 우리의 현재가 사실 얼마나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의 짜맞춤을 통해 급조된 것인가를 검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잘못 썼다고 뜯어내고 새로 시작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역사는, 삶의 공간을 깔끔하게 정돈된 서류철이 아닌 썼다가 지우고, 북북 긋고 그 위에 덧쓴 흔적들로 메워져있는 전화번호 수첩 같은 것으로 만든다. 바람에 날려 윙윙 소리를 내는 전기줄과 흔들리는 전선 위에 용하게 앉아 재재거리는 참새들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전봇대는 우리 삶의 공간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적 흔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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