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문화

대중예술의 철학 : 예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들

김남시 1999. 12. 9. 15:45
[저의 사정으로 인해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던 논쟁의 흐름이 끊긴 것 같아 '부리'님을 비롯한 독자 여러분들께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논의를 이어나가 볼까 합니다. '독자 감상'란이 아닌 '컬럼란'에 이 글을 띄운 것이 부리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본의 아니게 누를 끼칠까 염려가 앞섬니다만, 논의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해 보려하는 - 그리고 사실, 너무 오랫동안 컬럼을 진행시키지 못했던 점도 있고 해서 - 의도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술을 규제, 검열해야 한다는 이들은 예술이 그를 향수하는 구성원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미풍 양속'을 해치고 도덕적 타락과 범죄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오래된 지적 전통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실지로 어떻게 어떤 경로로 문화, 예술이 구성원들의 도덕적, 정신적 타락과 일탈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로 들어서면 원칙적인 도덕론만을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중예술에 대한 비판론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A Philosophy of Mass Art (Noel Carrol, Oxford 1998)중 우리의 논의와 관련있는 내용들을 거칠게나마 소개할까 합니다.

캐롤은 예술, 특히 대중 예술을 반대하는 논증들의 형태를 Massification argument, Passivity argument, Formula argument, Freedom argument, Susceptibility argument, Conditioning argument로 구분하고 그 각 논증의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그 중 두 논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대중화의 논증(Massification Argument)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 1. 대중예술은 대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상품이다. 2. 대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모든 상품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대중적 소비를 목표로 한다. 3. 대중적 소비에 적합하기 위해선 대중예술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보편적인 것에 목표를 맞추어야 한다. 4. 따라서, 대중예술은 가장 많은 수의 관객에게 공통적인 것에 목표를 맞춘다. 5.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중예술은 관객들의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적 취미, 감성 지성에 호소한다. 6. 따라서, 대중예술은 경향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의 취미, 감성과 지성에로 향한다.

반론 : 캐롤은 이에 대해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중예술은 가장 낮은 수준의 취미, 감성을 지향한다는 주장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경험적 사실들은 매우 낮은 수준의 취미와 감성에 맞춘 대중예술 생산물들은 오히려 많은 관객들을 잃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하드코어 폭력 포르노는 오히려 일반적인 대중적 취미에 부합하지 않음으로써 값싸게 소수를 위해서만 생산되며, 폭력 영화보다 디즈니 영화가 더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들은 수준 낮은 감성이 아니라 오히려 고차적 가치에 대한 어필을 통해 대중예술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수동성 논증 " 1. 어떤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면 그것은 관객의 능동적 관람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한다. 2. 그에 쉽게 접근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중예술은 관객의 수동적 관람을 부추긴다. 3. 따라서 대중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반론 : 그러나, 케롤에 의하면 한 매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곧 관객의 수동성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그에 쉽게 접근하게 만들어져 있긴 하지만, 관객의 능동적 관람을 요구한다. 미스테리 시리즈나 추리물 등의 대중예술, 라디오 드라마 등은 그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관객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조크를 알아듣기 위해선 그 함축된 의미를 이해해야 하며 대중소설을 즐기기 위해선 사건들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나레티브에 흡수된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 관객의 능동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MTV의 현란한 장면들 은 나레티브의 단편을 읽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안적 방식을 제기하며 관객의 능동적 구성작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중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하여>

케롤은 예술에 대해 도덕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플라톤 주의자들의 논증을 크게 Conseqentialism, Propositionalism, Identificationalism으로 구별하고 각각의 문제점들을 검토한다.

Consequentialism은 '대중 예술작품이 관객과 청중, 독자들의 도덕적 행위에 대해 인과적 결과를 낳는다고 하는 믿음이다. 곧, 대중예술에 노출되면 관객의 행동이 변화하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폭력적인 대중예술은 폭력적 행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선정적인 대중예술은 도덕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종류의 성적 혼잡을 일으킬 것이다.
Propositionalism은 예술 작품은 명시적이건 함축적이건 특정한 도덕적 명제(주장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칭한다. 예를들어, 포르노그라피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쾌락 도구이다라는 비도덕적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도덕적 신념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장 - 말하자면, 그를 채택하고 그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도덕적 신념이 관객과 청중, 독자들에게 구현되면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일으키는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만일 예술작품이 비도덕적 행위를 일으키는 생각이나 신념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면 문제가 된 작품은 그것이 행위의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Identificationism은 독자나 관객, 혹은 청중은 허구적 인물들의 감정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는 것이다. 인간 행위의 동기가 되는 그러한 감정이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것일 때 그것은 비도적적 행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의 세 주장은 모두 예술작품이 비도적적 행위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으므로 '검열'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케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선, 우리는 대중예술을 포함한 예술의 소비의 결과에 대해 사실상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토론토에서보다 디트로이트에서 폭력이 많이 발생하며, 왜 일본보다 미국에서의 폭력범죄가 많이 일어나는지 알 수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대중예술이 관객의 비도덕적 행위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 과장하거나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몇 몇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일반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폭력 만화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인형을 더 많이 때린다는 증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만화가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개인간의 폭력적 행위를 조장한다는 걸 의미할 수는 없다. 한 성인 남성이 섹스장면이 많은 영화를 보고 나서 앙케이트에 성적충동을 느낀다고 적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성 폭력적 행위로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 없다. Ted Bundy가 포르노를 보고 강간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고 해서, Jeffrey Dahmer가 엑소시스트3을 보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들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대중예술의 비도덕적 영향력을 주장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게다가 대중예술 속에 등장하는 행위들은 대개의 경우 도덕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곧, 그 행위는 그 묘사된 허구 속에서 정당화된다. 곧 한 픽션 속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은 전형적으로 역겹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예술에 대한 도덕주의적 비판론자들은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고 있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폭력이 관객에게 미치는 도덕적 영향력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한 관객과 독자는 매체 속의 폭력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슈퍼맨이 달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관객들이 그와 유사하게 행위하는 것을 조장하지 않는다. 대중예술의 허구가 내적으로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동기지워진 방식으로, 외적으로는 허구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 일반적인 관객, 청중, 독자가 그에 의해 직접적 행위를 조장하도록 하기에는 2중의 방어막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특정한 도덕적 주장을 함축하고 이를 관객과 독자에게 주입시킨다는 명제주의에 대한 반론 :
명제주의는 예술작품이 세계에 대한 '정보'-도덕적 진리에 대한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지식의 원천으로 여긴다. 곧, 내러티브가 도덕적 지식이나 신념의 원천이라고 여기며 따라서, 그를 함축하고 있는 예술 작품이 관객과 독자에게 자신의 도덕적 주장을 소통시킬 뿐 아니라 그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구로서의 대중 예술이 그를 관람하는 관객,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특정한 도덕적 신념이나 주장을 갖게 하는가? 우리가 한 작품을 감상할 때 그것에 감응할 수 있기 위해선 이미 우리가 특정한 도덕적 신념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허구 속의 주인공의 도덕적 신념이나 나레티브 전체가 암시하는 도덕적 메시지를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대개의 경우 작품 속에 함축, 전제, 제기된 명제들은 대개의 경우 상식적이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Truism일 경우가 많다. 그것들은 흥미롭지도,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지도 않는데, 작품으로부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추상화해 낼 수 있는 독자는 대개의 경우 이미 그를 알고있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품이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도덕적 경구들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면 작품이 우리에게 도덕적 지식이나 신념을 가르친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관객이 대중예술의 주인공에 스스로를 '동일화'함으로써 그 도덕적 신념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1. 독자나 관객은 허구 속의 주인공이 겪는 동일한 체험을 겪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Independence Day를 관람하는 워싱턴 시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허구 속의 주인공이 겪고 잇는 만큼의 심각성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대중 예술에 대한 완전한 동일화는 불가능하다.
2. 관객들은 허구 속의 모든 주인공에게 호의를 갖지 않는다. 관객은 특정한 도덕적 신념을 가진 등장 인물들을 혐오하거나 다른 등장인물들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는 관객과 독자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허구 속의 특정한 인물에게 호의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관객과 독자가 등장인물에게 완전히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도덕적 신념과 가치관을 '선택적으로' 공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3. 관객과 독자가 허구 속의 특정한 등장인물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등장인물의 모든 신념과 행위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그의 특정한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선 싫어하고 그에게 그와는 다른 행위와 가치관을 기대하기도 한다. 다시말해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도덕적 신념과 가치관에 대해 우리는 '선택적으로'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중예술의 등장인물에 대해 독자나 관객이 동일화함으로써 그 등장인물의 도덕적 견해와 신념을 주입받고 나아가 그에 동조하게 된다는 동일화이론이 과장된 것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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