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송두율과 서사의 시간성

김남시 2003. 10. 8. 00:48
송두율은 자신의 노동당 입당과 북한의 돈을 받은 사실을 나중에서야 이야기했고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근데, 그는 어쩌면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중이 아니였을까?

추리소설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결코 처음에 밝히지 않는다. 그는 사건의 정황과 배경, 피해자의 주변인물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사정들을 차례차례로 설명한 후 결국 다 끝에 가서야 범인이 누구였는지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의 끝에 가서야 왜 그가, 무엇때문에 어떤 이유로 사건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된다. 서사는 말하자면 이러한 시간성을 그 본질로 갖는다.

한 장의 그림이 주는 정보를 우린 많은 경우 단번에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부부의 사진을 보면 우린 금새 그것이 ‚아이들과 함께 산책나온 부부’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동일한 정보를 글로써서 혹은 말로 우리에게 전해준다고 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는 그날의 날씨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살고있는 동네를 설명한 후, 그 부부들의 나이와 얼굴 모양, 그리고 아이들이 입고있는 옷 등을 차례 차례로 하나하나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설명이 다 끝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아이들과 함께 산책나온 부부’의 이야기 였음을 알게될 것이다.

37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송두율이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의 모든 정보가 담긴 한 장의 그림을 들고갔더라면, 그 그림을 보고 누구나 단박에 그의 과거의 행적과 그의 삶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그런 그림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는 지금처럼 괴로운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그는 그의 어둔한 말로 그의 긴 삶의 여정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어떻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가 37년간 독일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가 이제 자신이 노동당에 입당했었으며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 순간 사람들은 갑자기 수군거리며 외쳐대기 시작했다. 왜, 너는 그걸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았었냐고. 왜 넌 그걸 숨.기.고. 있.었.느.냐.고.

37년간의 그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왜 그가 노동당 입당에 관한 이야기를 '이제서야' 말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중단되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정작 그의 이야기 따위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저들 성질급한 독자들은 처음부터 소설 책의 맨 뒷장을 펼쳐 범인이 누군가 부터 알려고했다. 이제 그 이야기 속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그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책을 집어던진다. 그리고, 왜, 그가 , 무슨일로, 어쩌다가, 어떤 상황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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