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전쟁과 감정의 윤리

김남시 2003. 4. 24. 18:11
자신의 이기적 입장만을 고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타인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 윤리적 삶의 기본 원리이다. 내 행위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봄으로써 인간의 행위는 동물들의 그것과는 달리 사회적, 윤리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개인의 행위를 보편적 행위 준칙의 관점에서 숙고해보기를 요구하는 칸트 윤리학은 이러한 점에서 윤리적 행위의 기본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타자의 입장에서 반성하라는 이러한 윤리적 행위에의 요구는 그 원리론만으로는 설득력과 정당성을 갖기 힘들다. 자신의 개인적 욕구와 이해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이기적 존재들인 우리가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우리의 이해관계에 대한 요구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저 윤리적 원리론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정의 문제가 윤리학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나는 나의 행위를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규제해야 하는가? 그건 타인이 나의 행위의 결과로 인해 받을 고통과 상처에 내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공감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타인의 고통이 내 행위를 그의 관점에서 숙고하고 규제할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모든 윤리적 행위에의 요구는 그 설득력을 상실할 것이다.

윤리적 행위는 그것이 다만 '선하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이 아니라, 한 행동의 결과로 인해 타인이 받을 상처와 고통을 나 역시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이 우리 또한 고통스럽게 하기에, 우린 그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우리의 이기적 행위를 규제하는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우리에게 던져 준 가장 치명적 재앙 중 하나는 이 전쟁의 복잡한 이해관계의 뒤얽힘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윤리적 태도를 상실케 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전쟁은 악한 것'이라는 원리론에는 수긍하면서도 그 전쟁에 얽혀있는 이해 관계 때문에 그를 반대하지 못했다.

'인명 손실이 있더라도 소위 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전쟁 당사국 미국의 논리와 '전쟁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국익을 생각해서 파병한다'는 한국 정권의 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이들 모두 전쟁을 윤리적 대상이 아닌, 흥정과 거래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이들에게 전쟁은 더 큰 이익을 위해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며 감행하는 사업이자 모험적인 투자에 다름 아니었다.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미국은 모두가 투자하기를 꺼려한 모험적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업가로 칭송되고, 참전하지 않은 국가들은 전망있는 사업의 기회를 상실한 실패한 투자가로 비난받는다. 파병의 기회를 잃은(?) 한국은 수익성 있는 사업에의 참여기회를 놓친 불운한 하청 기업가가 되었다.

흥정과 거래, 투자와 사업의 대상으로서의 전쟁이라는 그림은, 그러나 그것이 초래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숨긴다.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아이들과 그에 오열하는 그들의 부모, 부족한 의약품으로 죽어가야 했던 아이들, 무참하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할 그들의 부모, 저 커다란 눈과 고동색 피부를 가진 이라크인들의 고통이 우릴 아프게 하는 순간부터 전쟁은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오며, 우린 타인을 고통스럽게 할 우리의 행위를 규제할수 있는 사회적, 윤리적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