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국 대통령 선거소동을 보면서

김남시 2000. 11. 16. 06:48
혁명의 순간, 단두대 위에서,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던 저 왕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순간, 혹은 나폴레옹의 머리에 황제의 관이 씌워지는 저 장엄한 순간, 병든 왕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혁명 부대의 군대가 옛 통치기관을 무력으로 장악하는 순간, 권력 - 저 결코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일 수 없는, 아니 최소한 역사적 절대 정신의 창조물인 권력은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의 새로운 출현을 선포하게 된다. 수많은 인민들의 피, 혹은 최소한 반란군과 정부군과의 처참한 전투, 아니면 한 자연적 인간, 그러나 초인간적 의지에 그의 권력을 의존하고 있는 한 인간의 죽음등, 역사적으로 새로운 권력의 출현에는 언제나 드라마틱한 생명의 댓가가 치루어져야 했다. 저 극적이고 긴장되는 권력찬탈, 쿠데타, 혹은 혁명의 드라마를 통해 새로 출현한 권력은 자신의 존재와 힘을 알리고, 확인시키며, 그를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극적이던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투표에 의해 권력이 바뀌는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에선 저 예전, 전체 인민들을 긴장시키던 극적인 피의 드라마는, 개표라고하는 인위적인 통계행위로 축소되어 버렸다. 여기서 권력은 투표용지의 숫자에 의해, 더 많은 수를 차지한 사람에게 '신사적이고 평화롭게'이양되며, 그를통해 이제 권력 변동엔 - 일반적인 경우 - 그 누구의 피도, 그 누구의 희생도 요구되지 않는다.

TV드라마 만큼이나 진부해져 버린 이 '개표의 순간'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평범한 시민 그 누구도 긴장시키지 않으며, 사람들은 티브를 보며, 혹은 라디오를 들으며, 너무나 일상적으로 치루어지는 권력 변동에 참여, 아니 그를 지켜본다. 말하자면, 저 혁명의 시대에 비하면, 오늘날의 '개표행위'는 태고 시절의 긴장감과 아우라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굿판'처럼, 그저 다양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개표결과를 둘러싸고 공화당의 부시진영과 민주당의 고어가 벌이는 논란은, 소위 오늘날 권력이 지니는 정당성과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인위적인가를 보여준다. 투표용지에 구멍을 충분히 깊이 뚫지 않아 개표 기계가 그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일이나, 손으로 재 개표하겠다는 결정에 조작의혹을 제기하며 반대하는 공화당 측의 모습들에서도, 우린 오늘날 존재하는 권력이 얼마나 이 허약하고 결정투성이들인 테크놀러지와 작은 실수, 사람들의 익숙해진 습관따위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발견한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한 이런 실수 혹은 결함들로 인해 오늘날 투표를 통해서 밖에는 표현되지 못하는 소위 '국민들의 의견'이, 그 누구도 확인할 길 없는 익명적 숫자판으로 간단히 귀결되어버렸을 가능성, 구멍을 충분히 깊이 뚫지않음으로써 사표가 되어버린 '그들의 의견' , 또 어쩌면 그를통해 당선되어, 세계정치와 경제를 주도해왔을 미 합중국의 대통령...


'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붙잡힌 후세인 그후...  (0) 2003.12.17
송두율과 서사의 시간성  (0) 2003.10.08
전쟁과 감정의 윤리  (0) 2003.04.24
이라크 전쟁과 국제 시민사회의 붕괴  (0) 2003.03.18
월드컵과 새로운 정체성 (쉬어가기)  (0) 2002.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