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스크랩] 지진과 쓰나미가 변화시킨 땅, 집, 주거의 의미론. (탈 도덕적) 미학적 시도.

김남시 2011. 3. 19. 11:50

이웃 일본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생겨난 쓰나미가 수천명의 생명을 쓸어버린 일이 일어났던 시간 나는 독일의 공간 철학자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 Otto Friedrich Bollnow의 <인간과 공간 Mensch und Raum>을 읽고 있었다. 거기서 인간은 땅 표면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인간은 자신의 위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하늘공간 Luftraum 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늘에는 우리의 몸을 가로막으면서도 붙잡아 줄 아무런 저항성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 공간의 이러한 무저항성은 그 곳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몸을 다시 땅으로 떨어지게 한다.

 

우리는 발 아래 땅 공간 Erderaum 속으로도 진입할 수 없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하늘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반대의 이유에서이다. 땅 공간의 견고한 물질성이 그 내부로의 진입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속으로 올라갈 수는 없지만 밝고 가시적인 하늘 Sky 공간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서의 하늘 Heaven을 상상하게 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딱딱하면서도 불투명한 땅 공간을 향해 우리는 죽은 자들의 어두운 세계를 떠올렸다. 인간 삶의 모든 안정성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비가시적이고 어두운 땅의 견고함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이 움직이기 위해 발 아래 딱딱한 바닥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 바닥의 견고함이 인간 삶의 모든 안정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Otto Friedrich Bollnow, Mensch und Raum, 10. Auflage 2004, 48.)

 

하늘 위로도, 땅 속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이 땅 공간의 저항성에 의해, 비가시적인 땅 표면의 견고함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 진다. 그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을때 생겨나는 현기증이 견고한 땅 표면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의존성을 생리/심리적 차원에서 증거한다면, 바닥없는 곳으로의 추락이라는 토포스가 등장하는 신화와 문학은 이를 인류학적 차원에서 재차 확증한다. 그렇기에, 땅의 견고함이 상실되고 땅이 자신의 비 가시적 내부를 드러내면서 갈라지는 지진은, 다른 어떤 재해보다도 더 인간의 삶을 근본적 차원에서 동요시킨다.

 

땅이 그 표면에 붙어사는 우리의 안정적 삶을 위해 견고함을 제공하고 있던 것이 아님을 고통스럽게 확인시키며 움직였을 때 그 위에 ‘담겨있던’ 거대한 양의 바닷물도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인간의 주거지를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이 쓰나미는 우리에게 물이 가지던 일반적 의미를 전복시킨다. 맹렬한 속도와 위압적인 크기로 자동차와 집을 함께 쓸어버리고, 그것이 함께 쓸어온 물건들로 지나간 장소를 뒤덮어버리는 물은, 더 이상 정화와 생명, 관조적 명상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한 상태로 머무르기 힘든 물의 유동성은 그 엄청난 양과 결합해, 땅 표면 위에 머물러 있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거대한 가변성의 운동에 휘몰아 넣는다. 그로 인해 이 물은, 딱딱하고 견고한 사물들의 세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초현실주의 그림에서나 가능할 법한 사물들의 재배치를 현실화시켰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자동차, 마을 한 복판에 처박혀 있는 거대한 선박, 떠내려온 집, 쓰레기와 흙더미에 파묻혀 지붕만 남은 건물들...

 

 

쓰나미 재난은 또한 집, 우리의 주거지가 갖는 실존적 의미를 바꾸어놓는다. 벌로우에 따르면, 인간이 집 Haus에 ‘거주한다 wohnen’는 것은 ‘어떤 일정한 활동을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거주하는 것’은 일 하거나,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을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원하지도 않던 시간에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 파악하는 실존주의자들에게 인간은 다만 이 세계에 ’있거나 sein' ‘처해있는 Sich-befinden' 존재다. 그런 실존주의적 주체에게 세계는 자신에게 낯설고, 위협적이며, 이질적이며, 그러한 세계 속에 존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서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이 나온다. 집 Haus과 ‘거주함 wohnen' 은 이러한 실존주의와는 다른 인간 삶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인간은 낯선 세계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원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내던져져‘ 부조리하게 그저 ’실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집‘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자신이 속하는 그 집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세계는 실존주의가 그려내는 것과는 달리, 낯설고 부조리하며 엄혹한 장소가 아니라 살아감이 펼쳐지는 생명의 장이 된다.

 

인간이 세계에 ‘거주하는’ 장소, 세계를 낯선 곳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집을 ‘세우는 일 bauen’ 은, 외부의 위협 - 적, 바람, 추위 등 - 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벽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 아닌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 ‘외적공간’과 ‘내적공간’을 구분시켜 줌으로써 세계 내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또 자신에게 있는 것을 가능케 한다. 빌름 플루써(Vilem Flusser, Dinge und Undinge, Phaenomenologische Skizzen, 27)가 지적하듯, 벽은 그러나 우리에게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다. 벽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과 위협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그 내부에 가두어버리는 경계이기도 한다. 사방의 벽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외부의 위험들로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와 단절되어 갇혀있다는, 심한 경우 폐쇄공포를 얻기도 한다. 지진과 쓰나미를 통해 무너진 집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와는 또 다른 벽의 의미론을 생각했다. 벽의 물리적 저항력을 훨씬 초과하는 외부의 위협이 다가올 때 벽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무너진다. 붕괴하는 벽은, 세워져있을 때는 우리를 위해 외부적 위협을 막아주던 벽의 저항적 물질성을 그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덮치는 위협으로 변신시킨다. 외부공간에 대한 경계로서의 벽은 그것을 이루고 있던 물질 덩어리 - 콘크리트, 돌, 흙 - 가 되어 우리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파괴시킨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갑자기 지금까지 그 속에서 별 생각없이 생활하고 살아오던 건물의 물질성을 걱정하며 - 내진설계... -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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